디모데후서 1


1.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두 가지 이유를 말해야 한다. 실상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나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바울은 이 약속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었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어떤 관계일까?

    긍휼의 결과가 은혜이고 은혜의 결과는 평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쌍히 보셔서(=긍휼) 주신 선물(=은혜)이 은혜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평강을 누릴 수 있다.

3. 간구하는 가운데 디모데를 생각한다(3)?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하나님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다. 이 표현도 그 중의 하나다. 생각없이 하는 기도가 가능할까? 뜻도 모르는 말로 기도하는 게 가능할까? 아무래도 이상하다.

4.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눈물, 믿음(4-5, 빌 2:19-22), 그로 인한 감사: 바울의 대리인 자격으로 에베소 교회를 섬기던 그에게 왜 눈물이 없었을까? 신뢰할만한 믿음을 가졌기에 젊은 디모데에게 그럼 막중한 사명을 주었을 것이다. 디모데는 누구보다도 바울에게 감사를 넘치게 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니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로서는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3-4)?

5.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면(5) 거짓이 있는 믿음도 있나? 외조모와 어머니에게 있던 믿음이 디모데에게도 있다면 믿음도 유전인가?

    위선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이 있는 척하는 것 말이다. 디모데는 외식이나 형식에 매인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말이다. 이런 믿음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전수되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유전)이 아니라 외조모와 어머니의 엄청난 노력, 즉 신앙교육에 의한 것이다.

6.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이미 안수를 받았다(딤전 4:14). 또 다시 안수하겠다는 말인가(6)?

    그 때 받았던 은혜(=안수함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때 받았던 감격 뿐만 아니라 배웠던 교훈과 각오를 잊지말라는 당부다.

7. 바울이 병약(딤전 5:23)할 뿐 아니라 젊은(딤전 1:3-7) 디모데에게 바라는 것(6)이 꼭 목회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모든 성도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을 빽으로 두었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무엇이며 그 큰 사랑을 받았으니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왜 절제하지 못할까?

8. 디모데에게 안수 받을 때 받은 하나님의 은사 외에 또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는가?

    복음을 위하여 당한 자신의 모범: 한 마디로 복음을 위하여 살아온 ‘나를 보라’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이다.

9. 부끄러워말고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을 없애주는 것 아닌가?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롬 8:17).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다. 지혜롭지 못하거나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잘못한 것은 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10. 디모데 후서의 주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1:8). 도대체 무슨 핍박이 닥쳐오기에 이런 명령을 하는지 찾아보자.

    특별한 고난이나 구체적인 핍박의 내용이 디모데후서에는 없다. 대신에 거짓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고(3장), 말씀을 잘 가르칠 것에 대한 명령이 많다(1:11, 14, 2:2, 16, 22, 24, 4:2, 5). 그러므로 디모데가 받아야 할 고난이란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한 고난이다.

11.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를 선택하셨을까?

    하나님의 뜻과 은혜일뿐(9): 우리의 행위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알 수 없는 은혜다. 그저 주신 것이요(엡 2:8-9), 영원 전, 즉 창세 전에 작정하신 것이다(딛 1:2). 이런 복을 받았으니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충성하라는 것이다.

12.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은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다(9). 작정되었다는 것은 비유컨대 설계도인 셈이다. 실제로 그것이 현실화되는 계기는 무엇인가?

    예수의 나타나심(10):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듯이, 씨앗에 싹이 트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을 위해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냐?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13.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해보자(8-12)?

    복음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 바울은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12). 그 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반드시 이룰 줄을 확신한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임을 알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4.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부탁한 것을 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부탁한다. 이럴 때 우리는 ‘최선을 다 해서 지키라’고 당부하는 법이다. 바울은 어떻게 지키라고 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13), 성령으로(14): 결국은 같은 말 아닐까? 예수님께서 맡기신 바른 말을 지키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능력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함으로,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 설마? ‘모든’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어떤 감정이 묻어나는가?

    섭섭함: 아시아의 수도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밤낮으로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앞장서서 배신한 것에 대해서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바울도 이런 섭섭함을 느낄 나이가(?) 된 것 아닐까? 바울은 67년에 네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는 그 직전에 쓰인 것이다.

16. 배신자들을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배경처럼 작용해서 끝까지 함께한 오네시보로의 가족을 더 빛나게 하는 셈이다. 이 내용을 편지 말미에 쓰지 않고 초두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셈이다: 편지 말미에 썼다면 감사의 표현이 더 강하겠지만 여기서는 디모데에게 하고싶은 말이 더 강조되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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