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


1. 종을 해방시킬 생각을 않고 오히려 상전에게 복종하라고 하다니?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지 않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종의 인권에 별 관심이 없었나보다?

    제도의 변화가 목표가 아니라 인격의 변화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보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종을 해방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의 가치를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것이 종의 인권을 확립하는 가장 빠르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다. 노예를 해방하는 것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더라면 복음 전하는 것부터 어려웠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노예해방은 더 멀어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복음이 우선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2. 졸병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면 고참들이 따라할까? 종이 열심히 일한다면 주인이 수고했다고 상을 줄까? 종과 상전은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 충격적인 말이 본문에 있다면 무엇일까?

    상전을 형제라: 우리나라에서도 양반은 상놈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교회에서 상놈을 보고 ‘000 선생님’ 이라고 양반과 겸상하여 앉게 되자 감격의 눈물을 뿌렸단다. 그래서 자신을 형제로 인정하는 그 양반들(2절의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에게 더 잘 하게 되는 것(2절의 ‘유익을 받는 자들’=종의 섬김을 받는 자들)이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경건에 관한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적용 부분 아닐까?(=사도들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친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가르침이 바른 말이다.

4.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변론과 언쟁을 좋아할 수 있을까?

    말로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생명을 살리는 일이나 사랑을 나누는 노력이 아니라면 이겨도 쓸데없는 자존심만 세웠을 뿐 남는 것이 없다.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셈이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당시에 유명했던 소피스트(궤변론자)처럼 말로 싸워 이기는 기술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국 다툼만 일으킬 뿐이다.

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 목사를 돈벌이의 발판으로 삼는 자와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6. 지족(=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면(6) 지족하는 마음이 없는 경건은 어떻게 될까? ‘감사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데?

    작은 이익이 되겠지?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련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물질적인 풍요가 진정한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리를 진정으로 평안케 한다. 그렇다고 물질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일뿐 아니라 잘 쓰면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7. 단순한 삶을 살던 시절에야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좀 더 있어야 되는데? 집, 차, 아이폰...

    무소유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먼저 정립하라는 것이다. 족한 줄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이다. 건강한 부자가 더 낫다(17b-18).

8. 부하려 하지도 말고(9) 돈을 사랑하지도 말라는(10) 말인가?

    돈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들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는 말이다. 돈에 최우선권을 두면 결국은 자기를 찌르는 일(고기를 갈고리에 꿰는 일)이 벌어진다. 최우선권을 하나님께 두고(11b) 차선의 노력으로, 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하려고 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건강한 부자가 필요하다. 바울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천막을 만들었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려고 엄청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이런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9. 부하려 하지 말고(9-1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1-12)는 것은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하나님도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부하려고 한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부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선한 싸움이 된다.

10.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하신 하나님’(=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 민 16:22)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왜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라고 하는 걸까?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하는데 왜 빌라도가 끼여드는가 말이다. 간단하게 ‘하나님 앞과 예수 앞에서’ 그러면 되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셨던 예수님처럼 하라고!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른다(11).

11.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하시는가? (본문에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특히 어떤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가?)

    때가 되면 나타나실 분(15, 14): 아무리 위대하셔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야 걱정할 일이 없지만 분명히 나타나실 것이며, 심판하실 것이니 그 때까지 명령도 지켜야 하고 존귀와 영광도 돌려야 한다.

12. 부자들에게 무엇을 명하라고 하는지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하나님처럼 후히 주라(17b-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히 주신 것처럼 마음을 낮추고 재물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좋은 터를 쌓는 일이며 나아가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된다.

13.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는 무리는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는가?

    망령되고 허탄한 것(말과 변론): 실제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귀가 솔깃할 정도로 잘 가르친단다. 교회에서 답을 잘 듣지 못하는 난제를 때로는 너무 쉽게 설명하기도 하기도 한단다. 사이비가 자신들만이 가진 지식이라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거짓을 가르치기 위한 미끼일뿐이고, 아무리 진지하게 떠들어도 허탄하고 망령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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