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


1. 잘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긴 인사가 필요치 않다. 그런데 참 아들이라고 하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왜 이렇게 인사가 길까?

    이런 인사를 즐기는 것 아닐까? 그만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듣기 좋고 부르기 좋은 꽃노래인 셈이다. 편지를 쓸 때마다 사용하는 의례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2.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일부가 그랬고(1:1-2:14),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랬다(고후 3:1). 바울을 시기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이 이 문제로 시비를 걸었다. 디모데에게도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디모데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 감격스러워 하는 말일뿐이다. 목사가 미우면 목사된 사연이 얼마나 듣기 싫을까? 반대로 목사님을 통해서 엄청난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목사가 되어야 했던 사연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3. 바울이 인사에 많이 쓴 말은 은혜와 평강이다. 긍휼은 이 두 단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긍휼의 본래 의미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긍휼은 은혜의 출발점이고 평강은 도착점이다.

4. 동행하기를 원하는 디모데를 굳이 에베소에 남겨둔 이유는 무엇인가?

    사이비 율법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단이다. 상종하지도 말랬는데? 교회 내에 들어온 이단은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못하여 이단에게 교회를 통째로 넘겨준 사례도 있단다. 젊은 디모데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바울이 신뢰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교회도 이단과 싸워 이길, 교회의 진리를 파수할 수 있는 실력있는 성도를 길러야 한다. 맨날 ‘쫓아내버리라’는 말만 하지 말고!

5. 사이비 율법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교훈(3), 신화와 끝없는 족보, 헛된 말(6),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7): 신화(허탄한 이야기 딤후 4:4, 공교히 만든 이야기 벧후 1:16)나 끝없는 족보는 사람이 만든 얘기다. 위대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과장해서 자기들의 족보와 관련지었을 것이다. 성경도 없고, 신학교도 없던 시절이다. 누구 얘기가 옳은 얘기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다. 바울이 3년 동안 밤낮으로 가르친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한다. 자칫하면 엉뚱한 가르침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 위험을 디모데가 막아내야 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설교 중에 상당히 많은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윤리, 심리학, 인간계발론 같은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것은 큰 문제다.

6. 바른 교훈과 헛된 가르침의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바른 교훈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결국, 5절의 사랑)을 이루지만 헛된 가르침은 논쟁만 일으킨다(4). 어떤 교훈이든 하나님과 형제를 더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면 바른 교훈일 수 없다. 논쟁을 일으키고 분열을 일으킨다면 분명히 헛된 가르침이다.

7. 다른 교훈은 변론만 내는 것이다(4). 카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중세의 종교개혁이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분열을 가져왔다. 그러면 개혁세력의 가르침이 헛된 것인가?

    복음에 합당한지 살펴야 한다(11): (바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교회 내부의 옳고 그름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냐 아니냐의 문제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야 한다.

8. 명색이 교사이면서도 자기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

    흔하다: 우스개 같지만 가르치는 내용을 잘 모를수록 말이 어려워진다고 한다. 내용을 잘 모를수록 어려운 용어를 써서 가르치라는 말도 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경우다.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가르치는 경우는 더 심각하다. 교회를 지킨다고 교인들을 다 떠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교회를 지키는 목사도 있으니...

9.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하면서(8) 동시에 불법한 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9-10)은 율법이 적극적 기능과 소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적극적으로는 구원의 조력자이면서 소극적으로는 범죄를 억제한다: 율법이 완벽하지는 않으나 몽학선생처럼 구원으로 이끈다(인간이 죄인임을 알려준다). 잘 배우고 그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된다. 전혀 불편하지도 않다. 반면에 불법한 자들에게는 범죄하지 않도록 억제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심판의 근거가 된다.

10. 거짓교사들이 무슨 ‘망령된 짓이나 아비나 어미를 치거나 살인이나 음행을...’ 저질렀기에 여기서 이런 사람들을 언급하는 걸까?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들과 똑 같은 놈들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갈 1:6-9).

11. 9-10절의 악한 자들 중에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는 한 마디로 어떤 자들인가?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라는 말이다. 바울에게 맡기신 바른 교훈(복음)을 좇지 않는 거짓 교사들은 십계명을 거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선언이다(갈 1:8, 9).

    거룩하지 아니한 자(4계명)와 망령된 자(3계명),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5계명), 살인하는 자(6계명),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7계명), 사람을 탈취하는 자(10계명), 거짓말 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9계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므로 처음의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볼 수 있고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1, 2계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마지막의 표현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만 남는다. 바울에게 맡기신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거짓 교사들은 십계명을 거스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셈이다.

12. 예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여 부르신 이유를 바울에게서 찾는다면 그는 이방선교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시민권자로서 두 문화(헬라, 유대)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율법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직분을 맡았다고 말한다(12-14). 자신의 장점을 자랑거리로 삼기보다는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사도가 된 이후의 업적을 생각해보아도 자랑거리가 참 많을텐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이도, 나를 충성되이 여기신 것도 오직 그 분이시다.

13. 죄인 중의 괴수에게 가장 반가운 말이 무엇일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15, 마 9:13, 롬 5:8):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며 그만큼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일이다.

14. 괴수란 두목이라는 말인데 바울에게는 죄인 졸개들이 많이 있다는 말인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죄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들과 동역하던 다른 제자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15. 시범 케이스라는 말이 있다. 별로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별로 잘못한 것이 없어도 크게 혼이 날 수 있다. 바울은 시범 케이스로 예수님께 걸렸다고 말한다(16절의 ‘본’). 무슨 일에 시범 케이스로 걸렸으며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죄인 중에 괴수인 내게(13, 15) 이런 은혜를 주셨으니(12, 14)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겠는가(16)! 본보기(시범 케이스)도 본보기 나름이지 이런 본보기라면! 결국은 온통 감사, 감격뿐이다(14, 15, 17). 그런 감격을 하나님께 돌린다(17).

16.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아마도 디모데를 감독으로 세울 때(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임직하면서) 당부한 말씀일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믿음은 힘의 원천이고 착한 양심은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믿음과 착한 양심은 함께 가야하는데 착한 양심을 잃어버리면 회심하기 전의 바울처럼 좋은 믿음이 방향을 잘못 잡아 오히려 교회에 피해를 입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17. 선한 싸움을 위한 무기는 무엇인가? 자살폭탄? 오기?

    믿음과 착한 양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도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데 주로 사용되는 무기가 돈, 힘, 오기, 법 아닌가? 일부 무슬림들은 자살폭탄으로 성전을 치른다. 선한 싸움은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18. 믿음에 대해서 파선한 두 사람을 사단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회중의 결의를 통해서 징계를 했다는 뜻인데 역본에 따라 뜻이 조금씩 다르다. 참고로 영어 teach는 ‘가르치다’는 뜻 외에 무슨 뜻이 있을까?

    ‘혼내주다’란 뜻이 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훼방하지 못하게 징계를 받도록 사단에게 내어주었노라’ 말은 ‘하나님을 훼방하지 못하게 배우도록 사단에게 내어주었노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후메네오에 관한 딤후 2:17-18의 설명을 참고하면 단순히 혼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출교시켜 버렸을 수도 있겠다.

19. 디모데전후서와 디도는 목회서신이라고 불린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본 장의 내용을 다음 세 가지 주제로 정돈해보자. 즉, 목회자로서 사역의 바탕, 사역의 동기, 사역의 도구는 각각 무엇인가?

    사역의 바탕은 바른 교훈(3-11), 사역의 동기는 은혜의 체험(12-17), 사역의 도구는 믿음과 착한 양심(18-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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