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2장


1. 장절을 다시 가른다면 1절은 1장에 붙이고 2장은 3:5절까지 연결되는 것이 좋겠다. 술람미 여인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하는데 솔로몬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란다. 솔로몬의 이 평가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 대한 평가와 어떻게 다른가?

    거대한 사론 들판에는 수선화가 무리지어 핀다. 그 중의 한 송이는 별 것 아니다. 그냥 야생화일 뿐이다. 골짜기(이스라엘의 평원이나 들판은 골짜기에 있다)의 백합화(혹은 나리 꽃)도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주변의 가시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면 가시에 찔려 향기를 토한다. 서로가 상대방을 높여주는 관계는 바람직하지만 서로 잘났다고 우기는 상태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 자신은 정말 별 것 아닐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사랑은 우리를 이렇게 귀한 존재로 여기신다.

2. 남자의 고백은 짧지만 강렬하다. 사실은 긴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칭찬하는가?

    여자의 고귀함, 강인함: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주변의 가시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면 가시에 찔려 향기를 토한다. 교회는 이런 면이 있어야 한다(계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3. 다시 여인의 고백이 시작된다. 어디까지인가?

    일단, 9절까지(14절까지일 수도): 남자의 한 마디에 여인의 고백이 너무 길지 않은가? 연애 시절에는 이런 수다(?)스런 여인이 좋던데? 그 중에서 4-7절은 들어야 할 대상이 예루살렘의 딸들(합창단)이다. 10-14절은 애매하다. 남자의 노래를 여인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자의 노래라고 해야 하나, 남자의 노래라고 해야 하나?

4. 자신은 평범하고 별 것 아닐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가?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내 위의 깃발: 그늘이 나를 시원케 하고 열매는 달고 깃발은 나를 영화롭게 한다. 중동지역의 뜨거운 태양이 작렬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늘이 얼마나 시원하며, 그 열매는 얼마나 달까? 여호와 닛시, 하나님이 나의 깃발이 되신다면 승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구의 깃발 아래 있다는 것은 그 분의 모든 능력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당신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가시나무라면 그대는 백합화입니다’ 했더니 ‘당신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수풀이라면 당신은 사과나무입니다.’ 잘 났다!

5. 사론의 수선화는 수 없이 많이 핀 꽃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반면에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는 어떤가?

    신분상으로 아주 고귀하다는 뜻이다: 나무는 종종 ‘나라’나 ‘왕’에 대한 은유로 쓰인다. 수풀 가운데 있는 나무는 다른 나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런 나무 같은 남자가 수많은 수선화 중에 왜 하나의 수선화에 주목했을까? 은혜다! 이유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비유다. 성도는 그 그늘에서 쉼을 얻고 달고 단 열매의 맛을 본다.

6. 4절의 잔칫집은 ‘포도주가 제공되는 집’이란 뜻이다.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데이트를 즐기는 셈이다. 그 분의 사랑이 내 위에서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러면 신이 날까, 피곤할까?

    사랑하는 것도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 모른다. 사랑하므로 병이 났단다(5).

7. 사랑하므로 병이 들자 남자가 자신의 왼팔을 베게 하고 오른손으로 안는다. 어떤 느낌이 들었다고 하는가?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7). 4-5절이나 6절도 육체적인 관계를 은근히 암시하는 듯하지만 결정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7절이다. ‘흔들다’ ‘깨우다’는 것은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동일한 어근에서 나온 말)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8.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조용히 하란다.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란다. 그런데 노루와 들사슴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겁이 많은 짐승이다. 조금만 놀라도 튀어 달아날 듯하니 조용히 하라는 것: 본래 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마음이 너무 너무 예민해진다. 아이가 잠이 깰까 초인종 누르지 마라는 셈이다. 아이들이 많은 아파트촌에 물건 사라고 마이크로 떠들면? ‘아가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 이런 동요를 연상케 한다. 겉보기에는 그런데 추가로, ‘노루와 들사슴으로’라는 말(비쯔바옷 오 브아일롯 핫사데)이 ‘만군의 여호와와 엘 샤다이로’(브쯔바옷 오 브엘 샤다이)와 발음이 아주 비슷하다(아가서 이야기, 김구원 p145). 소위 언어유희를 통해서 여인의 순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는 셈이다.

9. 아무도 소리 내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했는데(7) 왜 깨어났는가?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서: 잘 만큼 잤거나 실컷 잤겠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이유가 있어도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탓이다.

10. 들리는 소리에 깨어나 보니 누가 내려다보고 있는가?

    (노루와 같고 어린 사슴과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망울: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망울 속에서 마치 노루나 어린 사슴이 먼 산을 넘고 넘어 달려와 창으로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하면 상상력이 풍부해지면서 이렇게 시인이 된다.

11.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먹는 것(5), 아픈 것(5), 자는 자세(6), 예민한 것(7), 깨는 것(7), 보는 것(9)까지!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이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을 가리켜 ‘The end of the world’라고 한다(오래 된 팝송의 제목).

12. 원기를 회복한 사랑하는 자에게 봄이 왔으니 함께 가잔다(원문은 ‘나오라’는 명령형이다). 이 부분은 여인의 회상이다. 남자의 노래는 정확하게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10b-14절: 남자의 노래다, 일명 왕의 초대다. 여인이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그 다음부터가 인용한 남자의 말이다.

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으니 함께 가잔다. 겨울이나 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시련: 겨울은 거의 모든 동식물들이 활동을 멈추거나 줄이고 움츠러드는 계절이다. 그 계절에 내리는 겨울비 역시 농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14. 연애편지를 잘 쓰려면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아름답게 그려야 한다. 여인이 회상하는 남자의 노래는 어느 부분이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하는가?

    시각: 11-12a, 13a, 14a, 청각: 12b, 14b, 후각: 13b,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15. 우리나라에서는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개나리, 진달래, 제비 등이 있다. 본문에는 무엇이 있는가?

    꽃, 노래, 비둘기(멧비둘기)의 소리, 무화과나무의 열매, 포도나무 꽃: 무화과나무의 풋열매는 초봄에 맺히는 것이다. 이게 익어서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

16. 사랑하는 사람을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순결, 정숙, 절개 그리고 아름다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에게는 다가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노출되지 않은 규중처녀와 같다.

17.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곳에 비둘기처럼 가만히 있다면 아무도 그녀를 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봄이 왔으니 나오라는 남자의 부름에 여자가 바깥으로 나오니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꽃이 핀 포도원을 허는 여우는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

    사랑의 방해꾼을 의미한다: 포도주의 집에서 교제하고 봄이 오는 들판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들에게 방해꾼이 있다는 것이다.

18.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16a) 이와 흡사한 표현을 예수님께서 많이 쓰셨는데 무슨 의미인가?

    하나 됨: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요 10:38, 14:10-11),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요 14:20, 17:21, 23).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하나 됨을 소망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7:23, 11:4, 겔 34:30)는 말씀이 있다. 이것이 고대의 성혼선언문과 유사하단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결혼을 약속하는 선언인 셈이다.

19. 16절 하반부의 ‘양 떼를’이란 말이 어떤 성경에서는 작은 글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원문에는 그 글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백합화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과, 히브리인들은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서 반복하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16절 전반부와 하반부가 같은 내용의 반복일 수도 있다. 그러면 16절 후반부는 무슨 내용이 되는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구나’, 혹은 ‘백합화를 먹는구나’로 번역할 수 있다. 성혼선언 다음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전반부는 영혼의 결합이라면 후반부는 육체의 연합을 노래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 우리말은 말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16-17절이 그렇다(굳이 ‘그에게’ ‘그가’라는 말이 남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말로는 남자의 말일 수도 있고, 여자의 말일 수도 있다. 남성, 여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히브리말로는 ‘내 사랑하는 자’는 남성이고, 양떼를 먹이는 자도 남성이다. 이 남자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함께 거함(혹은 하나 됨): 베데르 산(8:14에는 향기로운 산으로 번역)의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돌아오라는 것이다. 베데르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은유적으로 여인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베데르를 향품의 일종이나 ‘쪼개지다’라는 뜻을 지녔다고 해도 그렇다.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이 날이 저물면 보금자리를 찾듯이 사랑하는 여인의 품으로 돌아와 떠나지 않기를 노래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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