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 장


< 로마서 요약 >

      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제 2 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9:1-11:36
      1. 이스라엘의 과거/9:1-29
      2. 이스라엘의 현재/9:30-10:21
      3. 이스라엘의 미래/11:1-36
      제 3 부 하나님의 의의 적용/12:1-16:27

1. 우리말 성경은 롬 9:2을 1절과 구별하지 않았다. 원어는 영어처럼 뒤쪽에 오는 목적절을 2절로 구별했지만 우리말은 목적절이 중간에 오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한 모양이다. 원어상 2절만 따로 구별해 보세요.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이 부분이 핵심이고 목적절이다. 참말이고, 거짓이 아니며, 양심이 증거하는 것이다.

2. 앞장에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꺼지지 않는 불처럼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바울이었는데 무슨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이스라엘의 구원

3. 흔히 맹세할 때 하늘을 두고 맹세하거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기도 한다. 바울은 맹세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말하는 태도는 그런 느낌이다. 바울이 맹세를 한다면 어디에 걸고 맹세를 하는 셈인가?

    그리스도, 양심, 성령(1);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말이 바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게를 지닌 말이다. 성경에 손을 얹고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거짓말하는 사람과 비길 바가 아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도 천금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야한다.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결코 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던 바울이 이렇게 말할 때는 정말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4.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가장 저주받은 모습이다. 예수님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에서 보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에 대한 고통이다. 엄청난 고통을 감수할 각오로, 자신이 버림을 받더라도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 사람은 여기 바울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누구인가?

    모세;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노엽게 했던 때의 일이다(출 32:32). 자기 민족을 위한 바울의 이 고통의 결말은 롬 11:25-26에 있다.

5.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다. 유대교의 수호천사였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만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인데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한 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이다. 그런 바울에게 '너는 유대인이 아니다'고 비난한다면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본문을 이용하여 바울의 답변을 찾아보자.

    민족을 염려하는 나의 근심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내가 유대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많이 받은 영광스런 민족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6. 그리스도는 누구에게서 나셨는가?

    이스라엘 (공동체); 그리스도가 단순히 유대인이란 뜻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탄생에 유대인이 공헌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7. 유대인이 다른 민족보다 나은 점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하나만 고른다면?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저희에게서 나셨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당선이 확정된 후에 '우리 가문에서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만을 영광으로 여기지 무슨 덕을 보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 무척 감격했다. 나중에 그것이 입에 발린 소리였음을 알고 더욱 실망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련된 백성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다른 아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는 고아원 원장 부모를 원망하는 아들처럼 유대인들은 놀라운 특권을 받았음에도 알지 못한 셈이다.

8.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6절)는 데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가리키는가? 뒤이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증명하려는 예이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여도 그 약속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혈통을 따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너희가 참 이스라엘이요 약속의 상대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9. 법적으로 하자없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엘리에셀과 이스마엘과 이삭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만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어떤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장자? 적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난 자; 이삭은 육신의 자녀라기보다는 약속의 자녀인 셈이다.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임을 인정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낳은 아이니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 혈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처럼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받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10.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우리에게는 믿음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결국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순한 고백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렇다고 믿음이 행위의 하나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내면적이고 이면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따라서 누가 선택을 받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 다만 내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만 따지면 된다. 바울이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고백하는 감사의 표시이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면 '지금 믿지 않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믿게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 내지 남용하는 것이다. 지금 믿으면 참된 행복을 누릴 것을 실컷 혼이 나고 막판에 가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11.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육신의 자녀가 아닌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역설하였음에도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다. 전자에 대한 설명에서 어떤 시비를 거는 사람의 말을 막으려는 의도일까?

    이삭이 상속자가 된 것은 적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가령, 야곱과 에서는 혈통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야곱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주장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태어나기 전에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12.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만 등장인물은 여섯이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점을 따라서 세 사람씩 묶는다면?

    선택된 사람: 이삭, 야곱, 모세
    버림받은 사람: 이스마엘, 에서,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숙명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이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케 하시기도 하지만(출 4:21, 7:3, 9:12, 10:1, 20, 27, 11:10, 14:4, 8, 17) 바로가 스스로 강퍅한 것도 사실이다(출 7:13, 14, 22, 8:15, 19, 32, 9:7, 34, 13:15).
    에서도 스스로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다(창 25:34).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지라도 받아들이지 아니할 사람을 미리 아신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이나 선택해 두셨다는 것은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이런 하나님의 영역을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임을 확인하는 셈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책임하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에서나 바로는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거부하였다.

13.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핵심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린다고 얻는 것도 아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때문에 되는 것이고 얻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되 그 노력이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노력하게 하시는 분, 그로 인해 이루어지게 하시는 그 분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14. 바울이 토기장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을 인용하지 말고 자신의 표현으로 설명해보자.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면 악인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이 지셔야하는 것 아니냐(19절)는 항의에 대답하려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그것을 미리 알고 만드신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질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두 가지로 대답을 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시다는 것이다.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는 이것만 설명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또 한 가지, 진짜 대답을 하기 위한 예비적인 답변이다. 이런 항의성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은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기분내키는 대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잠시 접어두고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뒤이은 '관용하심'과 '부르심,' 그리고 10장의 '하나님의 의'가 바로 그것이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10:21). 비유컨대,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잘못하면 매를 댈 수 있다고 선언하고도 매를 들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는 것과 같다.

15. 두 가지 그릇이 있다.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가? 귀히 쓸 그릇은 목사를 의미하고, 천히 쓸 그릇은 평신도인가?

    핵심은 그릇의 종류가 아니다. 토기장이에게 그렇게 만들 권한이 있다는 말이다; 그릇의 종류야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십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단지 두 가지만 예로 들었을 뿐이다. 만약 바울이 더 많은 예를 들었다면 더 많은 직분을 동원해서 짜 맞출 것인가? 목사는 귀하고 평신도는 덜 귀하다는 생각부터 고쳐야한다. 만인제사장이란 귀한 가르침이 이럴 때는 왜 힘이 없는가?

16. 또 다른 두 가지 그릇이 있다.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과 영광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이 있다. 이 그릇들은 어떻게 될 처지인가?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 멸하지 않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영광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 분에 넘치도록 영광스러운 곳에 사용하더라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17. 이삭은 왜 구원을 받았고 이스마엘은 왜 버림을 받았는가? 이삭은 적자이고 이스마엘은 서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야곱은 적자이고 에서는 서자인가? 야곱은 하나님에게 순종했고 에서는 순종하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요?

    구원의 이유를 이삭과 야곱에서 찾으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야곱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하고 인도하심을 받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찾아야한다.

    구원문제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던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백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불러주심에 감사하는 것뿐이다; 비록 계시 차원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불공평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계시가 완성된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는 태양이 비치듯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있다. 성도에게는 이 빛은 온 세상에 전하라는 사명이 주어져 있다. 이 빛에 얼음은 녹고 진흙은 굳어지듯이 받아들이는 사람과 배척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18. 정리하는 차원에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분을 망각한 질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던 저렇게 하시던 기본적으로 우리는 항의하고 대들 형편이 아니다.
    2) 인간의 처지를 잘 모르는 질문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튜브를 던지면서 잡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공평하지 못하다고 힐문하는 사람이나, 많은 고아들 중에 한 아이를 양자로 삼았는데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3)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되, 인간의 동역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두셔서 대등한 교제를 원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절차는 꼭 필요하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하셨을지라도 마지막 선택만은 인간에게 맡기셨다. 이 은혜가 전하여지지 않은 곳에 먼저 받은 자가 전하여야하는 것도 하나님의 방식이다.

19. 토기장이처럼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호세아와 이사야의 예를 들면서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호세아의 글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이 두 가지는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충격적인 말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등장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사전조치인 셈이다.

20.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 구원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마지막 부분에서 그 단서가 될만한 말을 찾아 보라.

    믿음(30, 32); 많은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펴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니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은 성급하다. 믿음으로 되는 것이므로 믿어야한다. 새로 나타난 새로운 의를 입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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