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8~39 장


< 로마서 요약 >

      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Ⅰ. 문안과 하나님의 의/1:1-17
      Ⅱ. 죄론(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Ⅲ. 칭의론/3:21-5:21
      Ⅳ 성화/6:1-8:39
          1. 성화와 죄/6:1-23
          2. 성화와 율법/7:1-25
          3. 성화와 성령/8:1-39
      제 2 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9:1-11:36
      (다음에 계속)

16.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한 가지를 더 볼 수 있어야한다. 무엇인가?

    장차 나타날 영광(18); 장차 나타날 그 날만 바라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탄식하는 현실에만 집착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영광된 신분과 영광스러워질 그 모습(몸의 구속, 양자됨)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야한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

17.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성도가 제 위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피조물이 왜 그것을 바라는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이 비정상적인 상태는 피조물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이 제 자리를 회복하면 피조물도 저절로 제자리를 찾기 때문이다. 사 11:6-9에 회복될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18.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거나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나,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은 피조물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불쌍한 피조물 이야기는 왜 하는가?

    피조물의 회복도 사람의 회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복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회복될 인간의 이야기이다. 만물도 인간을 위해서 지어졌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물의 대표자로 창조하셨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인간이 단순하게 좀 더 빨리 진화된 동물이 아니다.

19. 양자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우리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함께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단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참고 기다리자(25);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는 17절 말씀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더 어려울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을 그리며 인내하자(18).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데...(22-23)

20. 믿는 성도들에게는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런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을 만물도 탄식하며 기다리고, 성도들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소망이 확실한 것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점이다. 다음 글을 읽으면서 성령의 간구하심이 특별히 효력이 있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대통령의 심복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가장 큰 조건이 뭘까? 충성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못한다.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음을 읽어내는 심복은 때로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고의로 어기기도 한다. 겉으로는 저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해주기를 원하고 계실 것이라는 정도까지 마음을 읽고 일이 잘못되면 대신 책임을 다 뒤집어 쓸 각오까지 하고 하는 짓이다. 이 정도는 돼야 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7);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열심보다 뒤에서 도우시는 성령님 때문에 더 효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속에서 계시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본문을 근거로 해서 달리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보고 있는 사람(18);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다(17). 예수님 때문에 인내하면서 사는 사람이다(25).

22. 롬 8:28절은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잘못하여 사람들에게 비난과 욕을 먹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는 생각은 오해다. 왜 그런가?

    이 말씀의 적용 대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적절한 고난은 감수하고 인내하고 양보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다가 문제가 생기고 고난을 받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런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판단을 했는데 착오로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잘못은 결국은 선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다는 약속이다.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엉뚱한 길로 가다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경우에는 이 구절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다른 구절을 적용해야한다.

    문맥을 따라 살펴본다면 이 구절은 성도의 개인적인 필요를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영광스런 구속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만다는 데에 중점이 있다.

23. 다음 구절에서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어디일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본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미리 아신 자'에 관심을 두고 예정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절차가 틀렸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는 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24. 구원의 8단계는 소명,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라고 한다. 이 중의 어느 단계가 본문에 나타나 있는가?

    소명, 칭의, 영화(39); 이 8단계는 신학자에 따라서 9단계라고 하기도 하고 순서가 조금 바뀌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라는 점이다. 중생에서 성화까지 순서대로 진행된다기보다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25. 우리의 구원은 만세 전에 예정된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전혀 없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그렇게 할만한 (                    )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노라는 고백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면도 그 한 마디를 우리의 공로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고백이다. 예정했을까 안했을까라는 생각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예정의 문제로 너무 머리 썩히지 말 일이다. 그저 고백하면 되고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의지

26. '모든 것'이란 말이 두 번 쓰였는데(28, 32절)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 28절의 모든 것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고 32절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실수하거나 그릇 행한 것을 말하면 후자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27.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 그렇다면 바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야하지 않은가? 할 말이 없다고 말해 놓고 계속 말하는 것은 무슨 심뽀인가? 다시 말하면 8장의 나머지 부분이 이 구절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누가 무슨 이의를 달겠느냐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은 감사뿐이다(35-39).

28. '누가 ....... 하리요?'라는 표현은 의문문이 아니다. 묻는 형식을 취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방식이다. 몇 번 나오는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네 번(31, 33, 34, 35);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38-39). 31-36절은 설의법 형식으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강조하다가 마지막 38-39에서 직설법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29. 31-39절을 원고로, 웅변이나 혹은 설교를 한다면 어느 부분에서 목소리가 가장 높아지겠으며 어디서 가장 조용하게 낮추고 싶은가? 여러 군데를 지적해보자.

    높은 곳; 여러 번 나오는 '누가'와 35절의 각 항목들.
    낮은 곳; 37절과 39절의 마지막 부분, 가장 강조할 부분이지만 오히려 나지막한 소리가 더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영혼을 사로잡는 소리는 포르테시모가 아니라 피아니시모이다.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다.

30.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끝을 맺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녹한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도살할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은 35-36절이, 그런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37-39절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두 부분을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을 8장에서 찾아보자.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18); 장래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 더욱 어렵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배가 덜 고프다. 장래에 대한 소망은 보증수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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