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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1. 1절의 '그러므로'는 7장의 몇 절과 연결시키면 좋을까? 7:6절;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었으니(7:1-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잠시 옆으로 샜다가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이야기를 하다가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잠시 언급한 셈이다. 그러므로 7장의 비참한 모습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이 모습이 아니다. 2. 치외법권이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일정한 요건 하에서는 법의 소추를 받지 않는 권리이다. 더 넓은 범위의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경우는 외교관의 경우이다. 외국대사관은 영토는 우리나라에 있어도 우리나라의 법이 아무런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성도는 치외법권을 누리고 치외법권 지역에 살고 있는 셈이다. 본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어떤 나라에서 어떤 나라의 법을 적용받고 있는가? 죄와 사망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2절); 율법이 다스리는 세상 곧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는 천국 시민이다. 3. 정죄하는 것은 율법이지만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7:2) 정죄함이 없다. 또 다른 이유를 3가지 찾아보자.
새로운 법(예수 그리스도의 법)의 도래(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일제의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던 죄인이 대한민국의 법에 따르니 건국공신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나 행위는 그대로인데 잣대만 달라져서 생긴 변화이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을 의미하는 구절이 본문에 있는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3); '육신에 죄를 정했다'는 말은 육신에 죄를 선고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보다 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라는 것 아닐까? '십자가에 죽으심'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의 일부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심보다 더 충격적이고 감사하다. 5. 본문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어떤 인간이며, 어떤 차이가 있으며, 결과는 어떤가?
1) 육신을 좇는 인간(육신에 있는 자, 8); 인간적인 노력이나 방법을 추구하지만 결과는 사망이다. 6. 대만은 일찌기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로 알려졌다. 하루 아침에 쉽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장개석 총통 시절인가? 법을 어긴 자기 며느리를 처형해버렸다. 이러니 어떻게 부정부패가 자리를 잡겠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로 인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과 비교해볼 일이다. 비록, 중국대륙을 공산당에게 빼앗긴 장총통이지만 대만을 굳게 반석 위에 세운 사람이다. 이렇게 비교해본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자기 아들을 희생해서 나라를 세운 분이시다; 혜택을 입은 우리로서는 입이 열 개가 아니라 수 백개가 있어도 감사와 찬양 외에는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감사는 더욱 커지기만 한다. 7. 육신의 생각이란 먹는 것, 입는 것,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가(7-8)?
육신의 생각이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말한다. 생의 목표가 자기 자신에게 있거나, 육신의 만족에 있는 경우라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영에 속한 성도가 먹고, 입고, 생육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히 11:6). 8. 열심히 헌금하고 전도하고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는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까? 그럴 수 있다. 그 열심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 즉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도 잘해주는 데도 미운 경우가 있지 않은가! 9.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예수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9);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하다. 내 속에 있기도 하고 성자 안에 있기도 하다. 신비로운 일이다. 10.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성령(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영에 속한 자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이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면 육신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도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다. 몸은 어차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껍데기만 율법의 정죄함에 남겨두고 알맹이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셈이다(10). 나무껍질에 허물만 남겨둔 채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나는 매미처럼. 11. 우리의 육체는 죽어서 썩으면 형체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는 말씀의 의미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모습으로 부활하셨다. 완전한 육체의 부활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모습이면서 예전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 12. 빚을 많이 진 사람의 태도를 크게 대별해보면 한 부류는 '배 째라' 형이다. 아예 갚을 생각도 없다. 또 한 부류는 빚지고는 못 사는 형이 있다. 어떻게든 갚아야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벌금을 갚기 위해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매달린 할머니도 있었다. 우리도 빚진 자라고 한다(12). 무슨 빚이며 어떤 자세로 살아야하는가? 원래는 율법(육신)에게 빚이 있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갚아 버렸다. 이제는 그 분께 새로운 빚을 졌다. 그러니 율법에게는 더 이상 빚이 없다. 때로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13). 즉, 육신에게 질 이유가 없다. 용서받은 탕자와 같은 배짱을 가져야한다. 난 더 이상 율법의 소추를 받을 자가 아니라는 배짱이 있어야한다. 그것을 가리켜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라고 한다. 13. 종과 아들 중에 누가 말을 더 잘 듣는가? 왜 그런가? 종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아들보다 더 순종한다. 아들은 경우에 따라서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수도 있다. 성도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라는 것이다. 14.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은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이 친근함으로 하나님을 대하라는 것이다. 부르짖는다는 표현은 까마귀가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것에서 파생된 단어다. 어린 아이는 아버지를 점잖게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진정한 아들은 고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대한 장래가 보장되어 있다. 15. 벤허라는 영화에서 노예이었던 주인공이 어느 날 귀족의 양자가 되어 모든 권한을 누리는 예를 볼 수 있다.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양자는 친아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전의 모든 신분이나 권리를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분과 권리를 누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요, 자녀이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자격은 없지만 양자가 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후사, 고난; 후사는 그 분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신분을 말하며 그런 신분으로 이 땅에서 살려면 고난은 필수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