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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1. 율법의 효력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미친다? 아닌데?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법은 여전히 유효하고, 조선시대 이야기를 보면 남편이 죽은 후에도 효력이 있던데? 본문이 말하는 (율)법은 보편타당한 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주 좁은 범위의 제한된 법조항이다. 3절의 '그 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법인가? 한계를 분명하고 그어보자. 유한한 인간의 법이고 남편에 대한 법이며 문화적으로는 당시 로마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지만 유한한 사람의 법은 살아 있을 동안에만 유효하다. 남편에 대한 법은 남편이 없는 여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죽은 남편에게까지 의무를 다 해야하고 죽은 조상까지 산 사람 취급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개념과 비교하면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는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다! 2.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4). 말하자면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말인데 언제,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심으로(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4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믿음으로'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한 대답이지만 그것을 가능케한 근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전자가 좋아 보인다. 3.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남편이 죽은 아내'를 예로 들었는데(1-3) 어딘지 핀트가 어긋나 있어서 좀 헛갈린다. 이 두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는지 찾아보고,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해 보자.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서 죽은 자는 율법이다. 반면, 바울이 든 예에서는 죽은 자가 남편이다. 제대로 되려면 아내가 죽어서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다른 세상에서 다른 좋은 남편을 얻어야 된다. 달리 설명한다면, 법조항에 따르면 '무슨 무슨 벌을 얼마나 받아야하지만 이미 사망했으므로 무죄다' 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4.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함이다(4). 열매란 말만 나오면 스트레스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여기서 열매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문맥을 보라, 전도나 예배출석, 헌금, 교회봉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자신들이다. 율법에 매여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은 것을 가리킨다. 5. 과거에 죄의 정욕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하여 열매맺게 했다는데(5), 사망을 위하여 맺은 열매란 무엇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라(7:23)는 말씀과 동일하다. 죄의 정욕에 매여서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사망을 위한 열매가 죄의 정욕이 주는 사망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의 기본은 바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6.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는 무엇인가? '법대로 하자'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관계가 다 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부부사이나 부자지간에 법대로 하자고 나서면 끝장난 상태다. 법을 좋아하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니 법(儀文의 묵은 것, 疑問이 아니다))을 버렸다. 대신에 무엇을 가져야하는가? 영의 새로운 것(6);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새로운 원리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게 된다. 형식과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의 도리를 뛰어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대한 감사가 성도의 바탕이 된다. 7. 어떤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죄를 지은 것은 피고인의 손뿐이라고 하도 강조하자 재판장이 '손만 형무소에 5년을 가두라'고 선고를 했단다. 그러자 피고인은 자신의 의수(義手)를 떼어놓고 당당히 재판정을 나왔단다. 법조항에만 집착하면서 그 법을 만든 의도를 전혀 무시한 예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법조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만든 하나님의 본래 뜻에 충실해야한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가? 6절; 영의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법을 말한다. 8.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잘못이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계속 저지른다. 잘못임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아픔도 없이 잘못을 저지를텐데, 이제는 아픔을 느끼면서 잘못을 저지른다. 깨닫고 행동을 돌이키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 경우에 잘못임을 가르쳐준 사람이 잘못인가? 이 사람은 본문의 누구와(혹은 무엇과) 같은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어도 계속 잘못하는 사람이 문제지 알려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래서 율법이 죄일 수 없다는 것이다(8). 전에는 모르고 죄를 지었고 이제는 의식하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저지른다. 9. 그늘이 져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햇빛이 비치자 방안이 온통 먼지 투성이다. 햇빛이 죄냐? 결코 햇빛이 죄가 될 수 없다. 바울의 설명은 이와 비슷하다. 본문에서 먼지와 햇빛에 해당하는 각각 무엇인가? 햇빛은 율법, 먼지는 죄(8, 11, 13, 14, 17, 20, 21): 먼지를 일으킨 놈이 죄인이다! 그 먼지 일으킨 놈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이다. 햇빛이야 먼지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10. 같은 물을 먹어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장미는 꽃을 피우고, 소는 우유를 만든다. 물이 잘못이 아니라 마신 자에게 책임이 있다. 이 물을 본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율법; 율법이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한 것으로 악을 행하는 자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 처음에는 율법이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율법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육체 속에 거하는 내가 문제이고 내 속에 거하는 또 다른 나, 즉 나의 죄성이 문제이다. 11. 율법이 죄는커녕 오히려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고 한다(12, 14, 16).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면 차라리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이라고 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12.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확신에 찬 바리새인이었다. 그 때 율법은 바울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는 것은 비명이다. 왜 이렇게 변해버렸는가? 문자적인 율법의 준수에 만족하다가 영적인 기준으로 보니까 그것은 전혀 율법의 준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어도 율법의 정신까지는 만족시킬 수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3. 어떤 사람이 건강한 사람인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피곤을 느끼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없다.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면 피곤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다. 피곤을 느낀 후에라도 빨리 회복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을 근거로 바울의 영적 건강상태를 체크해보자. 아주 건강한 사람이다; 전혀 유혹을 받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 이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유혹을 받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해서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인이다. 여기 바울의 이야기가 예수를 만나기 전이라고?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이런 류의 고민을 한 사람이 아니다. 성령충만 받기 전이라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고린도에서 이렇게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런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보라. 이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망의 몸에 대한 절망과 이것을 이기도록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감격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마 다른 데서 이 정도 현상이 나타나면 정신분열이라고 할 걸? 그래서 8장은 바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 것을 보여준다(행 14:15, 약 5:17). 14. 결국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 )신고를 하고 은혜가 다스리는 세상에 ( )신고를 한 사람들이다. 사망, 출생 15.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는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은 죄짓는 내가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율법은 선한 것이다. 16. 마지막 몇 구절을 보고 바울의 얼굴을 그린다면 어떤 얼굴을 그릴 수 있을까?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환하게 웃는 얼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웃음과 애통은 이런 것이다. 여기 바울의 비명이 바울의 아픔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아픔이냐, 혹은 회심 이전인가 회심 이후인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입은 성도라도 육신을 바라보면 절망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렇게 사는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