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 장


< 로마서 요약 >

      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Ⅰ. 문안과 하나님의 의/1:1-17
      Ⅱ. 죄론(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Ⅲ. 칭의론/3:21-5:21
      Ⅳ 성화/6:1-8:39
          1. 성화와 죄/6:1-23
          2. 성화와 율법/7:1-25
          3. 성화와 성령/8:1-39
      제 2 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9:1-11:36
      (다음에 계속)

1. 다같이 용서를 받았을 때는 죄 많은 자가 더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는 말이 아니냐고 하는 것은 5장에서 말한 바울의 어떤 말에 대한 시비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5:20); 이 말씀은 용서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하는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죄를 더 짓는 건데? 죄의 무서움과 용서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통하는 것이다.

2. 아주 친한 친구사이에 오해가 있어서 심하게 다투었다가 오해임이 밝혀져서 화해하고 나니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더욱 친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더욱 친하게 되었으니 한 번 더 싸우자면 어떻게 할까?

    그런 일은 없다; 친구 사이의 싸움이란 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안다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대가 남자를 사람 만드는 곳이라고 해도 사람되려고 일부러 가야할 필요는 없다. 국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일 뿐이다. 죄라는 것도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것이지 그로 인한 유익(?)이 있다고 고의로 더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어느 날 죄가 나를 찾아와 유혹을 한다. 그래도 우리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단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죄를 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나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내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죽었음을 안다면 어떤 이유로건 죄를 지을 수 없다.

4. 죄를 많이 짓고 난 후에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돌아선 간증을 들으면 저렇게 화끈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가? 죄짓는 것이 화끈한 신앙생활에 필요조건인가? 본인에게 물어보면 무엇이라 할까?

    정작 본인은 결코 그러지 말라고 권한다. 비록 회개하고 돌아섰을지라도 과거의 그 삶이 미안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21). 미지근하게 보여도 방황하지 않고 꾸준하게 하나님을 섬긴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5.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여기 본문은 아무래도 세례보다는 침례를 생각나게 한다. 왜 그런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함으로;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세례의 의미는 단순하게 죄를 씻는 정도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6. 죽음은 가장 불행한 일이다. 장례 때에는 억지로라도 울게 한다. 눈물이 나지 않아도 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장례식의 풍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좀 다르다. 그리 슬프지 않다. 아니 어쩌면 즐거운 환송식일 수도 있다. 이 짧은 본문(6:1-11)에 죽음이 몇 번이나 언급되어 있으며 그렇게 많이 언급하면서도 분위기가 슬프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4번 정도(십자가에 못 박힘, 장사됨, 연합됨도 포함해서); 죽음이야기로 도배한 것 같으나 당연히 죽어야할 죄가 죽었고 대신 영광스런 부활이 있으므로 전혀 죽음이 슬프지 않다.

7. 시간 중에 졸던 아이들도 가수 이야기나 연애하던 이야기를 시작하면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죽었던 아이들이 살아나는 셈이다. 공부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이야기에 대해서는 산 자인 셈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죄에 대하여 아무 반응이 없는 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값이 오르든지 내리든지 흥미가 없다. 죄의 유혹에 전혀 무반응이다. 반면에 엉뚱한(?) 것에 엄청난 감동을 받는다.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죄의 형벌이 없는 자; 비록 부족함이 많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형벌이 없다. 죽은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죽은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애를 쓰면 애만 더 달 뿐이다.

8.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당시에 형사 소송에서 사용되던 명제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당시의 어떤 법률적 용어가 본문에 있을까? (참고 벧전 4:1)

    죽은 자는 무죄(7절); 7절이 이런 명제가 아니라면 죽은 자가 누구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9.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12-13). 그러나 그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은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11);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졌음을 믿고 먼저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이다. 우리의 노력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노력이 먼저 있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사람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여기느냐(Identity)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존심(자기존경심)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런 바탕 위에서 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려는 노력이 따라야한다.

10. 우리 몸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죄의 병기(도구)도 될 수 있고 의의 병기(도구)가 될 수 있다. 흔히 연약하여 자신의 선한 의사와 상관없이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이미 범죄한 자에게 어떻게 적용하면 좋은가?

    형벌은 없다! 그래도 난 은혜 아래 있다. 그렇다고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범죄할 수 없다. 정말인가? 고의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혹 실수하는 수가 있다해도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하고'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14)'해야 한다. 실수하여 죄를 범한다 해도 여전히 의의 종이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더 이상 죄가 나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끈질긴 질병이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용서받은 탕자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필요하다면 잘못도 기억해야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은 더더욱 잊어서는 안 된다.

11. 15절을 쉽게 이해하려면 이 말이 어느 구절과 의미가 같은 지 찾아보면 된다. 어느 구절과 흡사한가?

    6:1-2절;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것이다.

12. 19절의 '육신이 연약하므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표현과 동일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신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라면 바울의 이 표현은 무엇이 약하다는 말인가?

    이해력 부족; 바울의 말을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는 뜻이다.

13.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그냥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면 되지 하필이면 술 취하지 말라고 하는가? 이유는 이 두 가지 행위에는 대조적인 면도 있지만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핏보면 비슷한데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다른 또 다른 예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19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사탄에게 종노릇한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엄청나게 다르다. 사탄의 종노릇은 괴롭다. 하나님의 종노릇은 정말 행복하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이런 예를 드는 것이다.

14. 바울 시대에 로마 시민 중에 자유인이 1/3, 종이 2/3이었단다. 종의 입장에서는 주인을 잘 만나면 그나마 인간 대접을 받는 것이고 주인을 잘못 만나면 짐승 대접도 못 받는 것이다. 종이라고 다 같은 처지가 아니라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인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은 주인을 잘 만난 종인 셈인데 바울은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17); 필연적으로 사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의의 종이 되었다.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굴복하는 의미의 종이라기보다는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차원의 종이다. 스스로 귀를 뚫고 종이 되는 경우처럼.

15.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 이 구절을 바울의 논지를 따라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믿음으로; '교훈'이나 '순종'이란 단어에 강조점을 두면 '계명을 잘 지킴으로' 의의 종이 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표현이다. 바울의 논지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16. 자유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의 상대개념으로 쓰일 때에는 나쁜 말이다. 이빨이 참으로 자유롭게 생겼네요? 가지런한 이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질서를 따라야할 경우의 자유는 나쁜 것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면 무슨 열매를 맺는가?

    마지막 사망; 영원한 형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 'free from ∼'은 '∼로부터의 자유'라고 직역되지만 실은 '∼이 없는' 이란 뜻이다. free from the rightousness는 의가 없는 이란 뜻이다.

17.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성격을 띠고 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혼재되어 있다. 본문의 어떤 모습과 유사한가?

    죄에 대한 우리의 모습;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럼에도 죄가 우리의 왕노릇하려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분명히 죄에 대하여 죽었음에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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