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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1. 아브라함과 다윗을 왜 등장시키는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2.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행위인가 믿음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성경의 어디를 인용하고 있는가?
창15:6; 소돔과 고모라의 사로잡힌 자를 다 되찾은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다. 행함을 강조하는 약 2:23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행함을 강조한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같은 구절을 야고보는 어떻게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로 이용하였는가?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함으로서 믿음없이 행함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며, '응하였고'라는 표현은 믿음으로 의롭게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나중에 행함으로 증명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3. 원어상, 1절의 '육신으로'라는 말이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육신으로 조상된 아브라함'이라는 말은 여기 바울의 주장과 문맥이 맞지 않는다. 달리 읽는다면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난하주를 참고해서 다시 읽어보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라는 말이 반드시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므로(3:9) 이렇게 고쳐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 2절 끝 부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에 생략된 말을 다 보충하면 어떻게 되나? (행위로 얻은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5.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를 어떤 사람에 비유하고 있는가? 일하지 않고 삯을 받은 자(5-8); 경건치 않음에도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요, 죄가 있음에도 죄 없다고 인정받은 자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는 놀고 먹는 자이다. 일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결국은 일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가 감사해서 드리는 '놀이'일 뿐이다. 6. 일하는 자는 삯을 왜 빚으로 여기는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월급을 은혜로 여길 줄 안다면 세상이 얼마나 즐거울까? 은혜는커녕 덜 받은 빚으로 여기는데 노사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7.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할례와 무할례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례와 구원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의 예를 든 것은 그가 할례받기 20년 쯤 전에(창15:6↔17:25)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할례무용론인 셈이다. 8.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식 때 행한 결혼서약인가? 그 대답과 본문의 할례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결혼식 때의 서약보다는 처음 청혼을 받았을 때의 약속이나 남몰래 두 사람이 약속한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한 마디를 평생토록 지키는 것이다. 결혼식 때의 서약은 두 사람만의 비밀한 약속을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일일뿐이다. 할례가 바로 그런 표라는 것이다. 두 사람만의 내밀한 약속이 바로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라면 결혼서약은 나중에 '인친 것'이다(11). 9.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10)? 란 표현은 원문을 직역한 것이므로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해도 한글 성경의 번역을 탓할 일이 아니다. 대답을 참고하면 이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좀 쉬운 표현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10.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겼다. 같은 혈통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절묘하게 아브라함을 이방인들의 조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방인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길래 아브라함을 이방인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점; 그야말로 절묘한 설명이다.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믿음 안에서 더 이상 혈통이 중요하지 않게된 것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반가운 것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한 것이다. 신분, 재산, 외모... 에 대해서는 너그럽자. 그러다보니 예수쟁이들은 저희들끼리 너무 친하게 지낸다고 기분나쁜 사람들이 있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쩌랴? 백조는 백조끼리 놀아야 마음이 편한 걸! 11.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무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양쪽의 조상이라고 말한다(11, 12, 16d); 초대교회에서 할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생명같이 소중한 것이었는데 복음 안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바울의 주장대로라면 할례를 전혀 무시해버릴 만도 한데 할례자의 조상도 된다고 함으로 양쪽을 다 포용하고 있다. 아, 절묘! 12.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천국의 후사라면 모르지만 어떻게 세상의 후사가 되나? 심판받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창 17:4-6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진정한 후사는 그리스도인이다. 13.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받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한 일은 무엇인가? 믿음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13, 6). 14.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15).' 율법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형편없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는가?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마이카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자전거가 별로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한 때는 '마누라는 빌려줘도 자전거(다음 시대에는 오토바이)는 빌려주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었다.
15. 13-16절을 참고해서 ( )에 알맞은 단어를 채워보자. 언약(약속), 믿음, 은혜(긍휼);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다. 16.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19)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바울의 말이 맞는가? 맞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창 17:17에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웃은 것은 분명히 바울의 말과 달라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모세는 언제 하나님을 믿었을까? 베드로는 언제 예수를 믿었을까? 떨기나무 아래서 못하겠다고 버티던 모세에게는 믿음이 없는 걸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던 그 때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없었을까? 바울의 결론은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