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7~3:8, 3:9~20 장


< 로마서 요약 >

      Ⅰ. 문안과 하나님의 의/1:1-17
      Ⅱ. 죄론(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1. 이방인의 죄/1:18-32
          2. 유대인의 죄(1) /2:1-16, 유대인의 죄(2) /2:17-3:8
          3. 전 인류의 죄/3:9-20
      Ⅲ. 칭의론/3:21-5:21
      Ⅳ 성화/6:1-8:39
         (이하 생략)

< 롬 2:17-29 >

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는 하나님의 뜻도 알고 지식과 규모가 있는 자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인가? 두 가지를 지적해 보자.

    1) 그릇된 자신감; 20절 끝에 '스스로 믿으니'라고 한다. 19-20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보다 더 못하다(잠 26:12). noise라는 영어단어에는 '소음'이란 뜻 외에 '(자칭)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도 있다. 자신을 평가하는 데에는 정말로 인색해야한다. 자신을 미완성인 존재라고 믿는 사람은 날마다 완성되어가는 존재이다.

    2) 가르침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아니함(21-23); 아무리 잘 가르쳐도 자신이 실천하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힘을 잃어버린다. 가르치는 자는 솔선수범 해야한다. 실천할 능력도 없는 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할 경우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지?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전하는 자가 실천할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인지 아예 안 하는 것인지는 기막히게 알아본다.

2.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17)이 어떻게 책망의 대상이 되는가?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책임의식은 없이 특권만 내세웠기 때문이다. 공부는 안하면서 자기 학교 자랑만 일삼다가 학사경고 받은 꼴이다.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어떨까? 자랑할 만할 것이다. 주변에 온갖 무리들이 다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면 나라를 망치게될지 모른다.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데 책임의식없이 자랑만 한다면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된다.

3.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십계명의 어느 계명 위반이라고 볼까?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삼 계명);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은 본인이 직접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온갖 부정부패에 그리스도인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귀한 말씀이 심각하게 오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믿음은 행위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는 선한 행실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로서 행위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4. 자격증이나 졸업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한 때 자격증 대여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회사나 건축현장에 유자격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실제로 일은 하지 않으면서 자격증 있는 사람이 명의만 빌려주고 잇속을 챙기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격증보다는 실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난다. 비유컨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것도 자격증보다는 실력을 보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을 상대로 본문에서 거부한 자격증과 요구한 실력은 무엇인가?

    거부한 자격증; 할례(25c).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증이나 마찬가지다. '할례받지 못한 자'라는 말은 '죽음을 당해도 싸다'는 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 유대인을 향하여 바울은 선전포고를 하는 셈이다. 자격증이 아니라 실력을 보이라는 것이다.

    요구한 실력; 율법을 행하는 것(25a).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형식적인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완성된 의미에서 율법의 준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완성한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예수 믿는 것'이다. 할례없는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자격증은 없으나 자격증보다 더 훌륭한 실력을 소유한 격이다(26절). 자격증보다는 실력이 우대받는 사회를!

5. 일전에 설교를 목사가 독점할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평신도에게도 설교를 하게 해야한다는 주장이 '복음과 상황'이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2001년 9월호). 이런 주장이 생겨난 배경은 목사가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내에서 집사나 장로가 목사보다 설교를 더 잘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실력도 더 낫다고 평가를 받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 비슷한 현상이 어디 있는가?

    2:27절; 무할례자가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하는 것. 비유컨대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목사가 바로 본문의 유대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증(할례)을 받았고 교과서(율법)도 가진 유대인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다가 졸업장도 없는 무자격자에게 비판을 받는 셈인데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6. 율법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예수님의 전례를 따라서 바울은 할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할례는 표면적이고 육신에 행한 것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할례는 어떤 것이며 그 할례는 어떻게 받는가?

    이면적이고 마음에 행한 것

    법조문(의문)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따르는 것(신령)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발달할수록 법조문이 많아지겠지만 반면에 법이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거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회라는 증거다. 마음이 전달되지 않고 상식이 통하지 않아 일일이 법을 갖다대야 해결이 되는 사회는 질이 낮은 사회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사랑이어야한다.

롬 3 장

< 롬 3:1-8 >

1. 바울은 어떤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두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이 본문에서 그 가상의 인물은 바울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어떤 질문인가?

    1) 유대인이나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1)?
    2)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3)? 가령, 시험이 너무 어려우면 선생님이 잘못한 것 아닌가?
    3)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냈으니 공로도 좀 있는 것 아닌가(5, 7-8)?

2. 유대인들은 '선민'이란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그것도 소용없고, 할례는 천국에 들어가는 보증수표처럼 여겼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면 바울이 유대인의 자존심을 너무 심하게 상하게 한 것 아닌가?

    잘못하여 소중한 보배를 깨뜨렸다고 해도 유대인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일이 많단다(2).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 영광스런 일이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킬 때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 심부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신나는 법이다.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그냥 옆에 두고 심부름이라도 시켜주십시오' 이런 말은 어떤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생각해 보라. 바울은 유대인의 유익이 많지만 한가지 외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만다(9:4-5).

3.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란 말은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잘못인가? 유대인들의 잘못인가? 시험 점수가 너무 낮으면 선생님이 출제를 잘못한 것 아닌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 사이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할 수밖에 없다(4).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불신으로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에서 약속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설명하려고 뜸을 들이고 있는 셈이다.

4.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가룟 유다가 팔지 않았더라면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일을 도운 공로가 있는 것 아닌가?' 1)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생각해 보고, 2) 이와 흡사한 본문의 주장은 무엇인가?

    1) 뱀을 잡는데 사용한 지팡이를 고맙다고 방에 모시지는 않는다. 뱀의 피가 묻었다면 태우거나 버리는 법이다.
    2) 우리가 불의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었으니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가(5)?

5. 영화 속의 악당은 주인공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한 악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악할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드러나는 것 아닌가?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인가?

    절대적인 선은 상대나 배경에 따라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을 더 선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전깃불을 몇 개 끈다고 태양이 더 밝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제 3자인 관객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관객이 따로 없다. 즉 영화의 최종 대상은 관객이지만 하나님의 최종 관심 대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6. 어떤 사람들이 바울을 비난하기를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라고 가르친다'고 했단다(8). 이것은 심한 곡해요 오해다. 바울의 어떤 가르침이 이런 오해를 불러왔을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이 도덕이나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율법준수를 예수님께서 비판했을 때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유대인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5:20)다고 말한 것을 억지로 곡해하면 '은혜가 더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으란 말이냐?'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행위는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어떻게 살던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자유'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함부로 남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오해이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필연적으로 행위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행위를 보고 믿음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통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 로마서 요약 >

      Ⅰ. 문안과 하나님의 의/1:1-17
      Ⅱ. 죄론(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1. 이방인의 죄/1:18-32
          2. 유대인의 죄(1) /2:1-16, 유대인의 죄(2) /2:17-3:8
          3. 전 인류의 죄/3:9-20
      Ⅲ. 칭의론/3:21-5:21
      Ⅳ 성화/6:1-8:39
         (이하 생략)

< 롬 3:9-20>

7. 지금까지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언급한 결론이 바로 9-20절이다. 이 결론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되는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다 죄 아래 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결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게 말하는 속내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8. '우리'(9절)는 헬라인을 가리키는가?

    아마도 그리스도인; 두 번 째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면 제 3의 인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였다는 주장에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9. 사람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위인전을 읽게하고 그들이 가졌던 꿈을 가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묘사하는 것인가(10-18)? 더구나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줄 뿐만 아니라 장밋빛 미래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지상천국을 이뤄 보려는 노력은 바벨탑 사건때부터 꾸준하게 있었던 일이다. 가장 최근에 가장 실망한 사건이 제 1, 2차 세계대전이다. 인류가 장밋빛 미래의 꿈에 젖어 있을 때 엄청난 전쟁이 일어났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일어난 후에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자 또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과학이 장래를 멋지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지만 그 희망보다 더 큰 위험을 동시에 주고 있다. 우리의 희망이나 힘의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허망하다. 하나님없는 사람 말이다.

10. 사람이 이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사랑을 쏟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없이 살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어디에 사랑을 쏟아야하는가?

    하나님께; 하나님을 통한 사랑을 사람에게 쏟으면 된다. 이것이 안되니까 다음 방법은 개에게 사랑을 쏟는 것이다.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것은 개는 사랑을 결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말 선하게 대해도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요, 실망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본문(19-20)에 따르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심판의 근거로 주어진 것(죄를 깨닫게 함); 정말 그런 의도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을까? 처음 율법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요 그림자이었을지라도) 율법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은혜의 복음을 받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이 죄를 깨닫는 역할밖에 못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래도 유일한 소망이었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현재 우리의 입장(은혜 아래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살 수 없겠지만(율법이 심판의 근거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었다.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의 처지가 그렇게 전락된 것이다. 트럭에 밀려 애물단지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한 때는 온 가족을 먹여 살리던 주인공이었던 낡은 리어카와 같은 모양이다. 한 때 바울에게 그렇게도 소중했던 율법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렇게 변해버렸다.

12. 율법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는?

    율법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이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즉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율법이 주고자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서 율법을 주신 자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13.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누구인지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 보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심판 아래 두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다.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도 율법 아래 있는가? 그렇다면 율법이 무엇인가? 좁은 의미로는 모세를 통하여 준 것이지만 넓게는 사람의 양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만한 모든 지식, 즉 일반 계시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온갖 노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준 것이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알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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