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7 장


< 로마서 요약 >

      Ⅰ. 문안과 하나님의 의/1:1-17
      Ⅱ. 죄론(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1. 이방인의 죄/1:18-32
          2. 유대인의 죄/2:1-3:8
          3. 전 인류의 죄/3:9-20
      Ⅲ. 칭의론/3:21-5:21
      Ⅳ 성화/6:1-8:39
          (이하 생략)

< 1:1-7 >
1. Identity, 즉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면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비난에 좌우되지 않는 유일한 비결이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종도 종 나름이지,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해볼만한 것 아닐까? 누구의 종이냐가 중요하다. 군대도 계급사회지만 계급보다 때로는 보직이 더 우선인 경우가 많다. 종이냐 자유인이냐보다는 누구의 종이냐가 더 의미를 지닌다. 주인이 정말 좋으면 주인을 떠나서 자유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귀를 뚫고 영원한 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귀뚫은 종이어야 한다. 여기서 '종'의 의미는 노예라기보다는 일꾼, 혹은 사역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다.

    사도; 비서도 비서나름이지 우습게 보면 안된다. 대통령의 비서는 어느 날 도지사나 장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은 역할이 바뀌면 사도가 되고 어느 날 온 세상을 호령하는 왕이 되기도 한다.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돈이나 명예, 권력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문제는 일시적이어서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점이 약점이다. 영원과 비교하면 너무나 짧은 행복을 줄 뿐이다.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육신적인 면에서 불행한 삶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혼이 누리는 만족은 남이 알지 못하는 큰 기쁨이다. 더구나 그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난 적이 없다. 제도적으로 12사도에 들었던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2.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삶의 목적인 셈이다. 복음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었는가?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주인공; 하나님; 구원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예수님이 귀하고 고마운 분인 것 이상으로 고맙고 고마운 분이시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성경 어디를 펴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전달 방법; 선지자들로 하여금 미리 성경에 약속하셨던 것;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방법이다.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나셔서 사람을 홱 바꾸어놓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작정하시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가시는 것을 믿는 자에게 약속된 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모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도 선지자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을 전해야한다. 믿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달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복음의 내용; 그의 아들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없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노력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사회구원이 아니라 영혼구원이 복음의 목적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한 후에 문화적인 사명도 있음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늘나라이었지만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항상 돌아보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3. 성경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불신자가 로마서를 읽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도전받는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

    예수를 그(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어떻게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불만을 품을 수 있다. 그러므로 4절의 '인정되었으니' 라는 말은 '확정되었으니' '선포되었으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4. 복음의 핵심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다윗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영원한 왕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후손은 메시야를 의미한다(행 2:30).

    영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은 생명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바울의 사명과 관련하여; 은혜와 직분을 주신 자; 아마 바울만큼 예수님을 좋아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예수를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던져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한 그 분이 자신에게 은혜와 직분을 주셨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가 존재하게된 원인이다. 바울의 존재가치는 복음에 있고, 복음의 핵심은 '그의 아들(2절)'에 있다.

5.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최대 사명으로 여기고 평생을 바쳤다. 그가 본 전도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본문의 표현으로 나타낸다면?

    출발점; 그로 말미암아,
    도착점;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신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그 분을 위하는 길만이 복음을 전하는 최대 목적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신앙생활의 목적이 '그 이름을 위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나 중심'인가? 천국 가기 위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그 이름을 위하여'와 비교해 보라. 중심이 다르다.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긴 루터는 우리와 비슷한가 아니면 바울과 비슷한가?

6. 로마서의 수신자는 이방인 중에 있으면서(6) 그리스도의 것으로 로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7)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이라는 말인가 유대인이라는 말인가?

    이방인이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지만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이런 구분이 별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사람과 짐승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차별을 둘 수 있느냐고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고대에 노예는 '말하는 도구'로 불렸던 점이나 흑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비뚤어진 심성의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구별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

7. 우리말이 좋은 점이 많지만 인사말이 길다는 점은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녕하십니까?'를 영어로 간단하게 세 음절로 할 수 있고, '안녕히 가십시오'는 단 음절로도 가능하다(Bye!).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을 영어로는 네 음절이면 가능하다. Grace and Peace to you! 멋지다! 구약의 히브리 인사와 비교하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구약에는 '샬롬' 즉 Peace만 사용했는데 신약에서는 Grace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그만큼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 1:8-17 >
8. '첫째는' 했으니(8) 둘째는 어디 있는가?

    없다; 기수가 아니라 그냥 '먼저'라는 뜻이다.

9. some에는 '어떤'이란 뜻과 '약간'이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11절에는 해석을 달리해야할 단어가 하나 있다. 어느 단어를 어떻게?

    무슨 → 약간

10. 로마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두 가지 마음은?

    감사(8); 감사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인데 복음을 전한 자도 없이 스스로 교회가 생기고 자라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신의 노력으로 교회가 자라는 것만이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교회가 자라는 것 역시 기쁨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이다.

    보고싶음(11);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뛰는 사람에게 전하지도 않은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11. 로마서의 대상자들은 이미 복음을 받은 사람들인데(6-8) 왜 또 복음을 전하고 싶다(15)고 하는가?

    견고케 하려함(11); 스스로 자라난 교회에 제대로 복음을 가르치고 싶은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참된 복음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전하고 싶은 열심이 분명히 있다.

12.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고 싶어했고 시도도 했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상태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15); 신령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11). 선생님도 공부 잘하는 아이가 있으면 더 잘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10)' 기도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갔다)

13. 바울은 복음을 예수에게 받았는데 왜 엉뚱한 자들에게 빚진 자라 하는가?

    예수에게 받은 사랑을 갚는 방법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는 것이 그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노력하고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했다고 고배할 수 있었다. 큰 사랑을 받았다는 인식 없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 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겸손이나 봉사의 시작도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서 출발된 것이어야한다. 빚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바울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복음의 채권자 노릇하고 있지는 않는가?

14.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기쁨을 주는가? 좋은 학생이 선생님께 기쁨을 주는가?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는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12).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움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얻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

15. 사진기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기를 설명하려면 무척 힘이 든다. '사람 그리는 기계'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없던 개념을 도입하려면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다. 자유라는 개념이 없던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개념이 들어오니 아무나 패놓고도 '내 자유다'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자유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식으로 추가 설명이 필요해진다. 믿음도 그런 것이다. 사람에게 없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개념을 믿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여 전하려니 의미가 혼동이 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17절을 잘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의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 믿음은 각각 어떤 믿음인가?

    과정이나 수단으로서의 믿음(믿음으로);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다. 믿기는 내가 믿고 교회에 나온 것도 내 발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간단하게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우리가 한 일을 비교해 보라.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신 일을 받아들이는 그 단순한 일을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완성된 상태로서의 믿음(믿음에); 구원 받을만한 자격, 혹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믿음에 이르는 방법은 믿음뿐이다. 믿으라.

16. 새로 생긴 작은 회사의 사원은 어디 가서 자신을 소개할 때 △△회사 사원 ○○입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게 어디에 있는 무슨 회사냐고 물으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지금도 복음 전하기가 부끄러운 판에 바울 시대에 사도는 변방의 신흥종교 전파자일뿐 알아줄 사람도 없던 시절이다. 요즈음 목사 ○○라고 소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회사의 사원이라도 제품에 확신이 있는 경우에는 당당할 수 있다. 그래서 사원들에게 자부심을 갖게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도 이런데 하물며 죽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수단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교회의 현실이 성도들을 당당하게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좀 부끄럽기는 하다. 그러나 복음 자체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는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 말씀이 살아서 움직일 때마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몇 번이나 살아서 힘을 발휘했을까?

    세 번; 하박국(원조; 합 2:4), 바울(롬 1:17; 히 10:38; 갈 3:11), 루터; 이제는 우리에게서 다시 한번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살리라'는 표현은 영어로 하면 'shall live'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화자(話者)의 의지에 의해서 '살게 될 것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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