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3장 |
베드로 전서: 2. 베드로에게는 글 쓰는 일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수제자였지만 달랑 이 편지 둘밖에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베드로가 어렵게 편지를 두 통이나 쓴 이유를 1, 2, 14절을 근거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고: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1) →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여(2) →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게 하려함(14)이다. 3.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이란 표현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구약과 신약: 거룩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를 의미하며 동시에 기롱하는 자들과 대비된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기원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4. 베드로가 보기에 성도들이 미혹을 받아 잊어버릴 위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주의 재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하면서 주의 강림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주의 재림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셨고(마 24:34), 천사들도 증거했으며(행 1:11), 사도들이 증거한 것인데(살전 4:15, 살후 2:1, 벧전 4:7) 이것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5. 말세에 기롱(譏弄: 속이거나 조소하여 놀림)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초대 교회 당시에 벌써 걱정할 이유가 있었을까? 여기서 말세는 초대교회 당시를 가리킨다. 예수의 재림을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정리한다면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6. 아무리 말이 그럴듯해도 ( )을 좇아 행하는 자는 기롱하는 자이다. 자기의 정욕(세속적인 욕심): 7. 기롱하는 자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가? 또, 이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은 무엇인가?
변하지 않은 세상(4): 만물이 창조된 이래로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8. 기롱하는 자들은 과거의 누구와 같은가? 노아 시대에 홍수가 무슨 소리냐고 비웃다가 물에 빠져죽은 자들과 같다: 홍수 사건은 세상이 과거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게 아니다는 예시이기도 하다. 물에서 나온 땅을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왜 다시 심판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이다. 9.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물로는 안한다고 하셨다(창 9:11, 15): 그러니 이제는 불이다(단 7:9-12, 욜 2:30-31). ‘그 동일한 말씀’이란 세상을 창조하시고, 홍수로 멸하시기도 하신 그 말씀을 가리킨다. 10. 종말은 무슨 종말? 이것은 지나간 ‘오랜 세월’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종말이냐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반박하는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우리에게는 오랜 세월이지만 하나님께는 오래 세월이 아니다(시 90:4). 11. 세대주의자들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역사를 1000년씩 6세대로 나눈다. 1세대: 창조에서 노아, 2세대: 노아에서 바벨탑, 3세대: 바벨탑에서 아브라함, 4세대: 아브라함에서 모세, 5세대: 모세에서 예수의 초림, 6세대: 예수 초림에서 재림까지이다. 6일간 창조 후에 7일에 안식하신 것처럼 제 7세대는 천년왕국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무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는 이미 2000년이 지났다. 1000년이 문자적인 1000년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모세와 예수의 초림은 약 1500년 정도, 아담에서 노아까지는 단순계산으로도 1650년 정도 된다. 12.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작이 더디실까? 동작이 느린 것이 아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9).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때문에 더뎌 보이는 것이다. 때로는 사랑이 사람을 바보처럼 만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사랑 없는 사람은 추진력도 있어 보이고 박력도 있어 보인다. 13. 주의 날이 왜 도적같이 오는가? 개선장군처럼 오지 않고? 뜻하지 않은 때에 온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항상 깨어있기를 원해서 재림의 날만은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다.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성도는 깨어 있어야 한다. 14. 여기서 ‘체질’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원물질을 가리킨다(다른 역은 ‘원소, 천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이런 원물질이 불에 탄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풀어진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난외주 참고, 10절 끝의 ‘드러나리라’는 말이 어떤 사본에는 ‘타지리라’고 되어있음) 만물의 해체 아닐까?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힘은 만유인력이다. 이 힘이 끊어진다면 마치 튼튼하게 서 있는 천막의 줄이 끊어지면 천막은 맥없이 넘어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풀어지고 만다. 그렇게 해서 하늘도, 체질도, 땅도 다 타버리면(풀어지면) 뭐가 남지?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의 거하는 바) 등장하는 것이다(13). 15. 하나님의 날은 더딘 것이 아니라(9) 도적같이 임하여(10)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10)이다. 하나님의 날이 확실히 온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권하기 위해서(11) =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힘쓰라(14)고 권하기 위함이다.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이런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16. 백번 양보해서 재림이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더디다고 하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 ) 때문이다(15). 오래 참으시기 17. 바울이 많은 책을 기록한 것을 베드로도 알고 있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책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베드로전후서만 해도 자신이 직접 기록하기 보다는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와 무슨 차이 때문인가? 지혜: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학문, 혹은 글 솜씨를 가리킨다. 은혜만 받으면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들어서 적합하게 사용하신다. 자신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아서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받은 달란트를 갈고 닦아서 잘 사용하도록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18. 느닷없이 바울 얘기는 왜 하는 걸까? 바울도 재림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19. 바울의 글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단다. 그러면 어떡하지? 억지로 풀지 말라(=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바울이 쓴 글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다면 사람이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예컨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루터를 위시한 선각자들이 이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도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 베드로는 글을 맺으면서 무슨 권면을 하는가? 삼가라(=주의해라), 자라 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