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


1.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였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의 겸손함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1)과 다른 믿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김(1):

2. 종이면 종이고 사도면 사도지, 종이면서 사도라니?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종이다. 스스로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사도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처럼 섬기는 자세와 말씀을 대언하는 무서운 권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

3. 우리가 어떻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가 믿노라고 고백하고 교회를 충성으로 섬겨도 그 공로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그 분의 선물일 따름이다. 그 믿음을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충성할 뿐이다.

4.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3절의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3): 결과적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이다(2):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는 단어(그노시스)가 아니라 확실한 지식(에피그노시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정확하고도 올바른 지식이다.

5. 하나님께서 의(1)와 능력(3)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2), 영광과 덕으로(3)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 이와 상대적인 개념이 ‘정욕으로 인하여 썩어질 것’이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들어온 것이다. 신의 성품이란 바로 이 죄악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되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6. 우리에게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4)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는다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우리가 장차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께서 준비하시는 모든 일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리스도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그 곳에서의 영원한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7. 흔히 믿음만 있으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5-7절을 근거로 본다면 베드로는 믿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셈인가?

    기초, 토대, 출발점(롬 5:1-4, 히 11:6): 기초가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기초만 닦아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위에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 올려야 한다. 기초를 중요하게 말하다보니 기초만 닦으면 다 된 줄로 아는 사람이 많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리스도인다운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덕(도덕적으로 탁월함), 지식(지혜),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이 필수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8.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고전 13장과 본문의 5-7절을 비교하면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고전 13:13)과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는 말씀((7)은 동일한 말씀이다.

9.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믿음만으로 불완전한가?

    그리스도를 알고 열매 맺는 삶(윤리적인 삶)을 위해서는 이런 덕이 필요하다. 초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다. 힘써 이런 덕을 쌓지 않으면 소경이요, 용서받은 죄인의 감격을 잊어버린다(9). 초대 교회 당시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윤리를 무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었는데 베드로후서를 쓴 목적이 바로 이런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다.

10. 믿음과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을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믿음: 믿음 없는 다른 덕목은 기초없는 건물이어서 소용이 없다. 믿음 위에 세워져야 이런 것들이 소용이 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만 그 위에 아름다운 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측면에서 믿음만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믿는 자가 윤리적으로도 탁월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1. 게으르면 열매가 제대로 맺힐 리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게으른 것’과 ‘열매 없는 것’은 거의 동의어이다(8). 여기서는 무슨 열매를 말하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믿고 힘써 노력해야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믿는 것만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내라는 권면이다.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따르게 마련이다.

12.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택하셨으면 그걸로 끝이지, 굳이 ‘힘써야 하고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하는가(10)?

    성령의 사역에 성도가 협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역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 분께서 다 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아는 성도는 힘껏 노력해야 한다(5, 10).

13.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12, 13, 15)는 말은 당부할 게 있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당부의 말을 하려고 하는가?

    죽을 때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하였다는 것은(14)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말이다.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12) 거듭, 거듭 당부하고 싶어한다. 떠날 때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14. 베드로가 장막을 벗을 것을 예수께서 지시하셨다고(14)?

    원하지 않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8-19). 단순히 늙어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하고 마지막 당부를 하는 것이다.

15. 거듭 거듭 당부하는 것, 자신이 떠난 후에도 성도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16)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19): 밀레도에서 행한 바울의 작별인사(행 20:23)와 다르지 않다. 12절의 ‘진리,’ 15절의 ‘이것들’이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맥을 따른다면 이것들을 기록한 것이 성경 말씀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셈이다.

16. 베드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확신하는가?

    친히 보았고(16), 들었기 때문이다(17-18): 이것은 변화산 상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마 17:1-9, 막 9:2-10, 눅 9:28-36). 단순하게 보고 들은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거의 정신이 나갔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생생하게 그 장면을 기억하면서 이런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17. 보고 들은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고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러한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과 같다. 그러므로 날이 새어 세상이 환해질 때(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등불을 주목해야 한다.

18. 성경말씀을 사사로이(임의로, 자기 멋대로) 풀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지자 개인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선지자가 전해주었다 해도 원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성경을 풀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자만이 성경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원칙에서 나온 말 중에 하나는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학식이나 학문의 깊이가 성경을 푸는 열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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