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5장


1. 초대교회 때부터 장로가 있었네? 목사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지?

    오늘날 장로교회의 장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세워진 제도이다. 용어와 의미를 성경에서 빌려왔으니 같다고 해도 될까? 구약에서는 나이 많은 어른을 일컫는 말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를 맡아 있는 어른’을 가리키는 말로 감독이라는 뜻이다(행 11:30, 14:23).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자이다. 목자장 되신 예수의 위임을 받은 작은 목자이다. 그러니까 이 말 속에는 오늘날의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목사도 장로의 일종으로 가르치는 장로이다.

2.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근거로 무엇을 말하는가?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이기에: 이게 어떻게 권면의 근거가 되는 걸까? 같은 장로로서 장로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자신은 증인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어려운 일이긴 해도 장차 누릴 영광을 생각해보면 보람된 일이다.

3. 함께 장로 된 자? 이 편지를 받는 장로들과 베드로는 같은 장로일까?

    베드로의 겸손한 표현이다: 장로라고 다 같은 장로인가? 도저히 그럴 수 없음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겸손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한참 후배인 장로가 자신을 장로로 세운 장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기본이 안된 사람이다.

4. 성도들을, 혹은 교회를 잘 돌보라고 하면 되지 왜 ‘양 무리를 치라’고 할까?

    베드로에게는 이 표현이 더 낯이 익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요 21:15-17).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교회를 이끌었고, 이제는 다른 장로들에게 동일한 마음으로 교회를 부탁하는 것이다.

5. 부인에게 이끌려 교회에 나온 분이 하는 말이 ‘예수쟁이는 완전히 물귀신’이란다. ‘한번만 가자고 해놓고 또 가자하고, 주일 낮에 갔더니 밤에도 가자고 하고, 수요일도, 금요일도.... 나중에는 새벽에도 가자고 할 거다.’ 교회를 섬긴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열심을 좀 내려면 끝도 없는 것이 교회의 일이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이렇게 힘든 일에 지치지 않고 열심을 낼 수 있을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2):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즐거운 마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설교를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과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우리 식구가 다 굶어죽는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6.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한이나 권위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본능을 억제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지만 양 무리를 치는 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3절,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양 무리를 권세로 다스리지 말고 먼저 본을 보여 따라오게(자발적인 순종) 하라는 것이다. 정말 어렵다! 남의 아이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자녀를 못 가르치는 이유는 다른 아이들보다 자기 아이에게는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권한을 억제하고 온유와 인내로 대하기가 어렵다. 밖에 나가면 어진 사람이, 자기 식구에게 그렇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맡기운 자들’이란 직역한다면 ‘제비뽑기에서 뽑힌 사람들’인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는데(수 18:10),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제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는 생각을 해보라.

7.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다면 시드는 면류관도 있다는 얘긴데?

    이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이 아니라 경기의 우승자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월계수 가지로 만들었다. 그러니 시들 수밖에!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목자장)께서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은 영원한 것이다.

8. 5절의 ‘이와 같이’는 ‘무엇과 같이’란 뜻인가?

    장로들이 목자장 되신 예수께 순종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듯이: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신하는데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9. 순복하고 겸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삭이나 다윗이다. 특히 무능(?)해 보이는듯한 이삭이 별 고생없이 복을 누린 것을 보라. 겸손이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0. 약한 자가 강한 자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굴일 수도 있다. 겸손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보일 수 있는 미덕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겸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6): 때가 되면 높이시는 것도 그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5b) 이유가 바로 겸손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1. 권고? 타이른다는 말(勸告) 아냐? 염려를 다 맡겨버리면 하나님께서 타이른다고?

    아니다. 眷顧(권고)는 돌본다는 뜻이다. 勸告와 다른 말이다. 방주 속에서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던 노아를 하나님께서 권념(眷念)하셨다고 한다(창 8:1). 돌아보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12. 사자가 왜 울까? 마귀가 왜 우는 사자와 같을까? 우는 사자를 대적한다고 울음을 그칠까?

    우는 사자란 배고픈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배부른 사자는 전혀 두렵지 않지만, 배고픈 사자는 목숨을 걸고 덤빈다. 마귀가 성도를 공격하는 모습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사자는 대적해도 덤비겠지만 마귀는 대적하면 물러간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정신 차려도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방법이 있으니 근신하고(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13.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아는 것이 어떻게 마귀를 대적해야 할 이유가 되는가?

    너희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다: 마귀의 하는 짓이 성도들을 넘어뜨리려는 것임을 알라는 의미이다.

14.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성도들에게 속한 것의 가장 큰 차이를 10-12절에서 찾는다면?

    영원함과 잠깐: 영광이든, 권력이든 하나님께 속한 것은 영원하고, 아무리 혹심한 고난일지라도 이 땅의 성도가 가진 것은 잠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할 때 우리가 누릴 영광은 영원한 것이 된다.

15. 하나님을 왜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이다(10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기 때문이다. 구원의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바로 그 분께서 친히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16. 베드도전후서는 원어상 문체가 화려한 헬라어로 기록되었단다. 베드로가 수제자였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을텐데 어떻게 화려한 헬라어로 글을 남겼을까?

    실루아노의 대필 덕분이다(12): 실라라고도 한다. 한 때 예루살렘 공의회의 파송을 받아 안디옥 교회를 섬겼다(행 15:22, 27).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동행했고(행 16장), 베드로와도 동역하였다. 기록한 장소는 바벨론이다(13, =로마). 베드로는 AD 63년 말에 로마에 왔다. 네로의 박해는 AD 64년에 시작되었다.

17. 도청당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은 말을 암호처럼 사용한다. ‘폭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요리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고 ‘폭격하라’는 말을 ‘요리하라’고 하는 식이다. 아마 베드로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바벨론에 있는 교회(13): 원어에는 교회란 말이 없이 ‘그 여자’라고 되어있다. 영어 성경은 ‘She who is in Babylon’이라고 직역을 했다. 성도들이야 금방 알아듣지만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AD 63년 말에 로마에 왔다. 네로의 박해는 AD 64년에 시작되었다. 로마의 박해가 시작되려는 마당에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이렇게 은유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지혜롭다. 이 표현을 보고 베드로전서가 바벨론에서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

18. 베드로에게 마가라는 아들이 있었네? 마가복음을 쓴 마가 아닌가? 마가와 실루아노는 무슨 관계일까?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섰을 때 바울이 마가대신 선택한 사람이 실라(실루아노)이었다. 마가 입장에서는 스승을 빼앗긴 사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두 사람이 베드로와 함께 동역하고 있다.

19.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으니 성도는 이런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과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문화적인 차이를 내포하는 것이다. 어떤 사이비 한국의 목사들(?) 중에도 이 구절을 그대로 애용하는 분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더라.

20. 바울은 인사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을 빌었다. 베드로는 작별인사에서 이 표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성도가 머물러야 할 토대는 바로 은혜이다(12b). 그 위에서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바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위에서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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