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장


1.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1):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셨으니 우리가 어찌 또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철로에 넘어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한국의 젊은이가 목숨을 버렸을 때 온 일본이 감격했는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고난을 당했는데?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

    지나간 것만도 족하니까(3)

2.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옷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육체의 고난이, 같은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어떻게 갑옷이 되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고 믿는 자(=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와 상관이 없다. 죄와 상관없는 자에게는 사탄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사탄을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다. ‘죄를 그쳤으니’라는 말은 ‘죄와 상관이 없으니’ 라는 말이다.

3.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宴樂)과 무법한 우상 숭배라는 것이 이것들을 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들이다(아무래도 술이 주원인이다). 죄는 이런 것들을 통하여 역사한다. 이런 것들이 주는 유혹을 어떻게 한꺼번에 끊어버릴 수가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짐으로: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인내하고 온유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다. 그래서 이것을 갑옷이라고 한다.

4.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2): 표현은 조금 달라 보여도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5.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하는 말이다. 똑 같은 내용을 ‘저희가’ 말할 때는 어떻게 말할까?

    이렇게 신나는 일을 왜 안 하지? 바보 아냐?: 불신자들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다르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6.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는 자들이 지금은 신이 나서 떠들지 몰라도 장래에는 어떻게 될까? (참고로, 직고(直告)의 의미는 ‘직접 고한다’가 아니다. 앞에 한 단어를 보충해보면 쉽다)

    하나님께 (이실)직고해야 한다: 그러면 죽어나겠지. 직고는 ‘사실대로 고한다’는 뜻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7.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죽은 후에 전파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죽기 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말이다(사도신경의 ‘산 자와 죽은 자’ 참조).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육체는 심판을 받으나(죽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 2절은 이렇게 살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복음을 전함으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 그런 다음 죽기는 하지만(육체는 심판을 받으나) 다음 세상에서는 영으로 하나님처럼 살게 하는 것이다.

8.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말한 것은 결과적으로 틀린 말 아닌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오늘 우리에게나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 자세로 살 것을 예수님께서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도 하셨고, 언제 오실지 자신도 모른다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되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종들이 땡땡이를 치고 있으면(눅 12:35-40)?

9. 다음 (      )에 알맞은 단어 하나만 넣어보자. ‘사랑은 (       ), 대접은 (       ) 없이, 봉사는 (       ) 하라’

    열심히, 원망, 서로: 사랑도 열심히 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생각도 하면서 열심을 내야 한다. 저절로 되는 사랑,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연애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죄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대접하면서 왜 원망이 생기나? 나도 먹을 게 없는데 손님까지? 초대교회에서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힘들더라도 기꺼이 이들을 대접하라고 권한다. 봉사도 하는 사람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누구는 무시 묵고(무 먹고), 누구는 인삼 묵나?’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서로 서로 봉사하고 도와야 한다.

10. 사람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한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남의 능력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서 다른 측면에서 성도를 섬겨야 한다. 어느 단어가 이런 뉘앙스를 풍기는가?

    10절의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은사를 성도들에게 나눠 주셔서(롬 12:6, 고전 12:7) 서로 봉사하게 하셨다.

11. 어렵게 사는 성도도 많지만 때로는 고위직에 있거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거나 많은 능력을 소유한 성도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척하고 살 수도 없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살면 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으로 알고 성실한 관리자의 임무를 다 하면 어려운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맡기신 주인이 있음을 알면 기도하게 되고, 내 것이 아님을 알면 어려운 형제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

12.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목사의 말인가?’ 본문의 표현을 이용해서 답을 해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같다: 전하려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신중하게 읽고, 묵상하고, 자신의 편견이나 지식에 좌우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무론 11절의 ‘말’이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매사에 이런 자세로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3. 봉사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하면서도 그 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조금 열심 내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다. 일을 좀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많은 재물을 누리게 될 때라도 이스라엘이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것을 누릴 힘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신 8:17-18).

14.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표현했다(고전 3:9, 막 16:20).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상이 본문 어디에 있는가?

    11절: 성도가 말하고 봉사하더라도 일이 되는 것은 자신의 열심 때문이 아니다. 일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고, 목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과 동역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다면 성도들의 말과 봉사가 아무리 진지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성도는 제 잘난 맛에 사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삶의 의미가 있다.

15. 처음으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좋은 일만 생길 줄 알았는데 왜 이런 비극이 생기나?’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12): 자식을 빼앗긴 사탄이 발악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그런 시험을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더욱 크고 확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단련시키시는 데에 사용하신다. 마치 금속을 불로 제련하여 깨끗하고 순수한 금속을 얻어내는 과정과 같다(계 3:18, 벧전 1:7). 그 후의 영광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13).

16. 시련이나 욕을 받으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영광스럽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13): 시험을 당하는 것이나 욕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이며(이것도 답이 될 수 있지만),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이것을 영광스럽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하신다.

17. 고난도 고난 나름이지 아무 고난이나 다 복된 것은 아니다. 고난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외에는 전혀 흠을 잡을 수 없는데 당하는 고난이다. 어렵겠지만 이렇게 살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이런 경우에는 고난이 아니라 벌이다.

18. 베드로가 이런 말을 다 하다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나?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 그 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그게 죄밑이 돼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 ‘나처럼 그러지 말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19.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렘 25:29, 겔 9:6). 그러니까 믿는 자들에게 고난이 임하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으로 여긴다(17). 성도들이 먼저 심판을 받고 겨우(?) 구원을 얻는다(18-19). 왜 겨우 구원을 얻는다고 할까? 롬 8:37, 벧후 1:11에서는 넉넉히 얻는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1)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여 방탕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다: 이 부분은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에 대한 격려와 권고에 대한 결론 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이나 유혹의 위험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겨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본다면 넉넉히 이기는 것이지만 시련을 당하는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과정을 간신히 이겨낸 셈이다. 믿는 성도가 이렇게 어렵게 불 시험을 통과한다면(12) 하나님의 심판 때 그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크고 두려울 것인지 생각해보라며 격려하는 말씀이다.

20. 시련이 아무리 거세고 강하다고 해도 크게 보면 다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가?

    고난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며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한다: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되 무엇보다 하나님께 이길 힘을 달라고 하라.

    연락(宴樂): 먹고 마시는 연회의 즐거움(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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