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장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어떻게?

    2장에서 보여준 여러 가지 경우 중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순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답 같다: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이 왕과 방백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종이 주인에게 순복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형편에서 본다면 이교도인 남편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던 아내가 개종시킨다는 것은 이런 순복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을 깨는 수밖에 없었다.

    지위나 능력이 열등해서 순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나 가정에도 이런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하는 말이다.

2. ‘말로 말미암지 않고’에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도를 순종치 않는 남편에게 행한 ‘아내의 행위’는 어떤 것일까?

    ‘말’은 예수 믿으라는 권면을 뜻하는 것이고 ‘아내의 행위’는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을 의미한다(1):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스도인 아내로서 순종하기 좋은 말만 했을까?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일도 많이 요구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순복하라고 한다. 믿지 않는 남편의 요구에 본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순종하라는 것이다. 순교자적인 자세로 버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순교자적인 자세로 순종할 때 남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믿으라고 하는 것은 남편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3. 믿지 않는 남편에게 아내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내의 두려워함과 정결한 행위를 통하여(2):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아내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하나님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알게 되면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정결한 행위가 결국은 하나님 때문인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보게 된다. 비단 남편과 아내 사이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는 것은(3)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장신구를 달거나 화장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외모에만 신경 쓰는 것을 금하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을 여자들이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로 사용하면 비블리시즘(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에 빠진 셈이다. 말씀의 진의를 잘못 파악하면 우리는 부모 형제도, 재산도 버리고(마 19:29, 막 10:29, 눅 18:29), 밥도 먹지 말고(마 4:4, 눅 4:4), 오직 복음만 외치다가(딤후 4:2) 바로 굶어죽어야 한다.

    본문의 핵심은 외모 단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심령을 단장하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여자들이 단장하지 않은 때는 별로 없었다. 단장하고, 화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다. 외모를 단장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을 단장하라는 것이다.

5. 마음에 숨은 사람(속 사람, 곧 마음)을 무엇으로 단장하는가?

    온유함과 안정함: 이것은 썩지 않는 것이다.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썩을지라도(?) 이것은 썩지 않으므로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온유는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를 가리키고, 안정함이란 타의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성품이라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다.

6. 남편에게 순복하지 않으면서 외모만 아름답게 치장하면 어떻게 될까?

    남편 구원은 물 건너갔다. 믿는 남편을 둔 경우라면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 불가능하다. 남편의 구원은 모든 배알을 다 버리고(순복하라니까) 얻을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올바른 가정을 세운다는 것은 올바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7.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과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같은 말: 선을 행하는 것은 마음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이고(온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남편의 억지나 부당한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안정) 아닐까? 그것이 바로 사라의 딸, 곧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말이다.

8.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7절)과 아내에게 요구하는 것(1-6)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1절과 7절에 공통으로 ‘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말이 기나 짧으나 원리는 같다는 뜻이다.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능력이 없음에도 가정의 대표로 당당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가? 슈퍼맨의 비애라는 노래가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슈퍼맨이 아닌데 슈퍼맨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렵다고?

9. 무식하게 아내와 동거하는 자가 있는가?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생각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성관계, 관심사항, 언어, 사고방식...): 그래서 한 사람은 ‘안 해준 게 뭐고?’ 하고, 또 한 사람은 ‘해준 게 뭐고?’ 한다. 제발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공부하기를 바란다. 바이올린 줄을 기타 줄 매듯이 하다가는 판판이 터져 버린다. 악기를 다루려면 악기마다 줄의 굵기나 강도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내는 남편과 전혀 다른 이종의, 연약한 그릇이며, 동시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겨야 한다. 굉장히 어려운 과제다. 공부 많이 해야 한다.

10.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더 연약한 그릇: 남자보다 훨씬 더 센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다고 그렇게 여기면 꼭 탈이 나더라. 아무리 거세고 강한 여자라도 여자로서 다루어져야 하고, 충족되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렇게 여기고 더 귀히 여겨야 한다. 공동상속의 경우 다른 사람의 동의가 없으면 재산을 처분할 수 없다. 아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재판장 앞에서 ‘그게 아닌데’ 하면 어떻게 되지?

11.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도가 막히기 때문이다: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왜 기도가 막힐까? 부부가 싸움을 하거나 서로 미워하고 있다면 기도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하다. 가정에서 드리는 기도는 남편과 아내가 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

12. ‘마지막으로 말한다’면서 마지막이 본론만큼이나 긴 경우도 많다. 정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다: 현 위치가 베드로전서의 중간지점이니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아니겠다! 위치상으로는 그렇고 내용상으로는? 아마 한 단락을 마무리 하는 것 아닐까? 2:18부터 시작한 사람과의 관계를 마무리하는 모양이다.

13. 그리스도인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복을 유업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복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기보다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그들에게 복이 전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신 바이다. 아브람을 불러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이다.

14.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지혜롭게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형제는 어떻게 사랑할까(8-12 요약)?

    서로 복을 빌라: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도 좋으나 표가 잘 나지 않으니 서로 복을 비는 것이 가장 좋은 형제 사랑의 방법 같다.

15. 하나님의 눈이 향하는 사람과 귀를 기울이시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런데 주의 낯이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12) 이 말을 인용한 원문을 찾아보라(시 34:15-16).

    심판의 의미이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시편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만 인용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시편을 잘 모르는 우리가 잘못인가, 알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말하는 사람이 잘못인가? 히브리인 들에게는 자연스런 표현이란다.

16.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선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3-17절과 18-22절의 문맥을 파악해서 두 가지 답을 찾으시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17).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14) 선을 행한다고 해롭게 할 자가 반드시 없는 것은 아니다. 뒤이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이란 말씀이 그 반증이다. 육체적인 해가 영혼까지 해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복이 있기 때문이다(14)도 답이 될 수 있지만 문맥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답 같다.

    예수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18-22).

17. 두렵게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고난 받는 것도 복이기 때문(14),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시기 때문에(15).

18. 겁을 주면 겁을 먹어야 되는데 도무지 겁을 먹지 않으면 겁을 주던 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담대하게 행하면 두렵게 하던 자들이 무슨 질문을 하게 될까?

    너희는 왜 죽음(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핍박하던 자들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거든 대답할 말을 준비해두란다. 일제시대에 고난 받던 성도들이 무엇을 믿으며 어떤 생각으로 일제에 항거했는지 자신들은 대부분 아무런 글을 남겨두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 검사들이 성도들을 조사하여 내용을 조리있게 기록해 두었다. 말하자면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한 수재들을 자신들의 신앙을 글로 쓰는 조수로 쓴 셈이다. 자신의 신앙하는 바를 조리있게 대답하도록 하라는 권고이다.

19.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예수님의 말씀(눅 12:10-12, 21:13-14)과 왜 다르지?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두려움을 갖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는 것이지 대답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준비된 자를 들어서 더 크게 쓰신다. 대답 중에 최상의 대답은 선행이다(16, 17). 대답할 준비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은 항상 그런 자세로 살라는 뜻이다. 그러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저절로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20. 15절에서는 두려움을 가지라고 하고 14절에서는 두려워 말라고 한다. 어느 말이 맞는 거야?

    15절의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를 핍박하는 대적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21. 성경에는 여러 가지 양심이 있다. 약한 양심, 악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 남의 양심, 화인맞은 양심, 청결한 양심, 더러운 양심... 그러면 선한 양심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양심: 그리스도인이 선한다고 말할 때 하나님 외에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이라고 해야겠다.

22.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거나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그게 그거지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양심만 있어도 선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과 악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23. 19절은 해석상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도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나 그렇게 말할만한 근거가 성경에는 달리 없다. 논란이 많고 의미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냥 넘어 가자.

24. 베드로는 앞으로 닥쳐오는 환란을 은연중에 노아의 홍수에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셈인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실 동안 순종할 것: 그 홍수에서 구원받은 무리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여 여덟 명처럼 구원을 얻으라. 방주 안에 잘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방주는 곧 교회를 상징한다.

25. 홍수 때 세상을 덮은 물은 온 세상의 악을 제하여 버리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노아의 가족은 그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다. 우리가 받는 세례가 바로 이렇게 죽을 물에서 건져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씻는 표인가?

    마음: 선한 양심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것이란 마음의 죄를 씻는다는 뜻이다.

26.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통과한 결과는 무엇인가?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높아지심: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런 문맥에서 본다면 난해한 19절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까지 낮아지셨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성도들에게는 이런 고난과 낮아짐을 통하여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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