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1. 1절의 ‘그러므로’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것(1장의 결론, 즉 23-25절): 이미 구원받은 자가 다음 단계, 곧 성화로 나아가야 할 것을 말한다. ‘모든’이란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된 것은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탓이다.

2. 어떻게 하면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릴 수 있을까?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 방법이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이다(신 8:2, 고전 3:2, 수 1:8). 악한 것을 버리려고 애를 쓰다보면 오히려 악한 것에 눈이 더 밝아지거나 닮아가기도 한다. 차라리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것이 쉬운 방법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에(3) 그 분의 인자하심을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그런 점에서 1절과 2절은 대조를 이룬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과 ‘순전하고 신령한 젖’, ‘버리고’와 ‘사모하라’.

3.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2),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에(3): 좋은 음식에 맛들인 사람은 아무 것이나 먹지 못한다. 분유 회사에서 병원의 분만실에 자사 분유를 공급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신생아조차도 처음에 맛을 본 것 외에는 안 먹으려고 하는 수도 있단다. 건강하게 살려면 옛날에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으라고 했다. 요즈음엔 좋은 음식을 잘 가려 먹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제대로 자란다(=구원에 이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야 한다(엡 4:13-15).

    그렇다면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성도는 어떻게 된 걸까? 음식이 당기지 않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아니면 엉뚱한 간식을 즐기고 있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히 5:11-14).

4. 닥쳐오는 시련을 잘 견뎌내도록 권하는 말씀이 숨어 있다면 무엇인가?

    예수는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4): 십자가의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사람의 손에 흔들리지 말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라고 은연중에 전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신령한 집으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자라라고 한다.

5. 산 돌(Living Stone)이 뭐야? 이 산 돌이 신령한 집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버려진 돌(쓸모없는 돌)의 반대 개념이며 메시야를 가리킨다. 요긴한 돌이란 뜻으로, 이 산 돌을 기초로 해서 작은 산 돌인 성도들이 신령한 집을 이룬다: 메시야를 돌(마 21:42, 단 2:34)이나 반석(고전 10:4, 3:11)에 비유했는데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강조하는 표현이 ‘산 돌’이다.

    개인으로서 성도들은 아이가 자라듯이 자라야 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는 서로 연합하여 집을(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젖이요, 기초석이다. 교회(공동체)를 세우라는 말이다. 동시에 이 집에서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한다.

6. 예수는 모퉁이 돌이기도 하고 부딪혀 넘어지게 하는 돌이기도 하다. 누구 탓인가?

    믿는 자(6-7a)와 믿지 아니하는 자(7b-8) 탓이다: 믿는 자에게는 요긴한 모퉁이 돌이겠지만(사 28:16 인용)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사 8:14 인용)이다.

    같은 돌을 두고 한 사람은 그 위에 튼튼한 집을 지었고, 한 사람은 그 돌에 걸려 넘어졌다. 아, 쪽 팔려! 넘어져서, 잘 세워진 집을 쳐다보자면 얼마나 애통하겠는가! 신경질이 나서 파버리겠다고 나섰는데 사실은 땅 속에 파묻힌 부분이 너무 커서 파낼 수도 없는 돌(=기초석)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모퉁이 돌은 벽과 벽이 만나는 곳을 받쳐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방인과 유대인, 이방인과 또 다른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하시는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좋겠다. 형제와 하나 됨, 부부가 하나 됨, 성도가 하나 됨은 예수라는 튼튼한 돌 위에 기초를 두었을 때 제대로 이루어진다.

7. 다음 구절은 말이 이상하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7)? 믿는 자에게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는데(6) 어떻게 된 걸까?

    인용된 부분을 구별해야 한다.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는 부분이 인용된 것인데 그 의미를 살려서 ‘참으로 애통한 일이 되고’로 바꾸어 넣어보면 된다. 믿지 아니하는 자와 건축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부류이다. 인용된 것임을 표시하지 않은 성경은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끊어 읽으면 될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하니라’ 이렇게 끊어서 인용된 부분을 한꺼번에 읽어야 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렇게 읽으면 완전히 망친다.

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8)에서 ‘이렇게’는 ‘순종치 아니함’인가, ‘넘어짐’인가? 6절의 인용문과 대조해서 생각해보자.

    넘어짐이다: 6절의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함’이 성도가 장차 누릴 영원한 생명이라면 8절의 ‘넘어진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혹시 이것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해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니 하나님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넘어지도록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고백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잖아? 그렇다. 그렇지만 ‘네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맞다. 어느 말을 따를 것인가? 결국 선택은 본인에게 달린 문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자유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그 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9. 다음 각각의 표현이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임을 설명하는가?

    택하신 족속(사 43:20): 낙점이란 말이 있다. 여러 후보 중에서 왕이나, 대통령이 선택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일까? 대학 입시나 고시에 합격한 것보다 더 감격스러울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자부했던 것과 비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새로운 선민이다.

    왕 같은 제사장(계 1:6, 출 19:6): 그리스도인은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피조 세계의 왕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가는 제사장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한 때 범죄하여 쫓겨났을지라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인간의 중보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마 27:51, 히 10:19-20 만인제사장주의).

    거룩한 나라(출 19:6): 거룩이란 구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구별하여 쓰셨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역할을 맡았음을 말한다. 그 분과 특별한 관계, 즉 그 분의 통치하에 있음을 말한다.

    그의 소유된 백성(신 7:8, 말 3:17): 소유라고 번역된 단어는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한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시켜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연인 사이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게 하려함 =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 아브람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혼자서 복을 누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복을 누리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빛에 들어간 성도는 어디를 가더라도 빛이어야 한다.

11. 그리스도인의 구원 과정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어두움과 빛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영원한 죽음(=죄), 영원한 생명: 죽음에서 불러내어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표현보다는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표현이 더 실감나고 멋이 있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비유로 표현하면 내용이 훨씬 쉽고 부드러워진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이 정도로 문학적인 능력이 탁월했을까? 성령을 받은 탓일까? 대필했던 실루아노의 덕일까?

12. 베드로는 은근하게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 다음의 ______ 친 부분을 히브리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생각해서 어디를 인용하고 있는지 찾아보자.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호세아: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로암미, 호 1:9)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암미, 호 1:10)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로루하마, 호 1:6)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루하마, 호 2:23).

13.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행인 같이 살아야 한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본 집(돌아갈 곳)이 따로 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11)은 육체는 나타난 현상 일뿐 본질은 영혼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비록 우리가 육체의 정욕에 잡혀 살고 있지만 이것을 제어하여 영혼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영혼이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은 육체가 임시 거하는 곳이다.

14.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

    선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다: 몸이 괴롭고 힘이 들지는 몰라도 정말 영혼을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면 이것이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는 데에도(15) 가장 좋은 방법이다.

15. 13절 이하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선한 행실을 나타내면 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선한 행실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무엇일까?

    순복: 왕과 방백에게 순복하라. 이들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襃獎 칭찬하여 장려함)하기 위하여 세워진 자들이다. 무조건 순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주를 위하여’ 이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뭇사람, 주인, 형제도 공경하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여 피를 뿌리라고 선동하는 것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힘은 순복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온 세상을 점령했다. 간혹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세상을 정복한 왕이 있긴 했지만 예수처럼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사랑뿐이다.

16. 자유와 하나님의 종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16)? 하나님의 종은 자유자인가? 종이 어떻게 자유자가 되는가? (참고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하나님께서 죄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이제 자유자가 되었으니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죄에서 자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된다. 그러면 역으로 하나님의 종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유자가 될까? 13절 이하의 문맥을 잘 살펴가며 생각해보자.)

    자발적인 순종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한다: 자유를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12) 기꺼이 순복할 때 진정한 자유자가 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뭇사람, 주인, 형제도 공경하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기꺼이 종노릇을 할 때 어머니로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린다. 종노릇도 그런 종노릇이 없을텐데... 그런 어머니가 가장 행복한 자유자이다.

17. 부모님들이 잘못하고 있을 때에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순복해야 한다(18):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말씀은 순복해야 하는 근거가 주인의 성품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물며 부모에게 순복해야 하는 근거도 역시 그분들의 옳고 그름에 달리 문제가 아니다. 우선 순복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한다.

18. 고약한 주인에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 주인에게 받지 못한 은혜(=아름다우나)를 하나님께 받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시므이에게 욕을 듣고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기 원하며 참았던 다윗이나(삼하 16:10-12), 이유없이 옥에 갇힌 요셉(창 40장), 억울하게 매맞고 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행 16:19-34)를 들 수 있다.

19. 죄가 있어서 매를 맞으면 어떻게 하나?

    참아야지: 참아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뻔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은 죄를 짓고 매맞으면서 참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0.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받을 때 참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21).

21. 예수의 애매하게 고난을 받은 것을 설명하는 22-25절을 사 53장과 비교해보라. 어떤 표현이 같은가?

    입에 궤사가 없음(사 53:9),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사 53:7),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사 53:5),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사 53: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사 53:6):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잘 참으셨으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이 그리해야 하지 않는가?

22. 예수께서 이렇게 죄없이 고난을 받으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24):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죄의식도, 죄로 말미암은 심판도 우리와 상관없고, 오직 의로 말미암은 상급만 우리와 관계가 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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