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5장


1.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란 말은 이미 여러 번 언급된 말이다(22:1, 26:3, 33:50). 같은 말을 굳이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일종의 문단나누기인 셈이다: 이곳에서 6개월 이상(40년 5월 - 41년 1월 10일)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마지막 준비를 했다. 하나님께서 또 새로운 말씀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인구조사(26), 가나안 정복계획(33), 레위인 성읍(도피성 포함, 35)에 대한 새로운 말씀이 있을 때마다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다.

2. 레위인들에게 주는 성읍을 처음부터 따로 주지, 왜 각 지파가 얻은 땅에서 떼내어 주라고 하시는가?

    일정한 지역이 아니라서: 레위인들은 흩어져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지역을 주지 않았다. 지파별로 분배된 넓은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재분배할 때에 그 지파 내에 거주하게 된 레위인들에게 성을 배분하라는 것이다.

3.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말라고 하시더니 여기서는 주라고?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고 거주하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터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으로 받는 땅은 생산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지만 레위인들에게는 거주하기 위한 땅을 나눠주었다. 성읍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함이고, 들은 가축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세상은 ‘무소유’를 존경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성직을 맡은 레위인들에게도 이런 땅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4. 레위인들이 차지하는 들의 면적에 대한 4, 5절의 설명은 중복일까? 개역성경의 난외주나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원문상 4절의 ‘2천 규빗’은 ‘일천 규빗’을 뜻한다. 4절과 5절이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번역을 그렇게 한 모양이다. 성읍의 크기를 무시한다면(고대에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보고) 성읍에서 일천 규빗 거리의 사각형의 들이라면 한 변이 대략 2천 규빗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4절의 ‘일천규빗은 성읍에서 들의 끝까지의 거리, 5절의 ‘2천 규빗’은 정방형 들의 한 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5. 48 성읍을 12지파별로 나누면 한 지파당 평균 4개의 성읍을 도로 내주어야 한다. 얻은 땅의 비율로 내는 것이 타당하다. 레위인들의 성읍이 전국에 이렇게 골고루 퍼져있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어떤 유익이 있을까? 오늘날 교회가 지녀야 할 어떤 측면과 닮았을까?

    효과적인 선교: 모인 교회가 아니라 흩어져 복음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닮았다. 믿는 성도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지역, 직장에 속하여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해야 한다. 소금이 녹지 않고 뭉쳐 있으면? 흩어진 레위지파는 알맞게 녹은 소금인 셈이다.

6. 거의 대부분의 나라마다 소위 거룩한 곳이나 신성불가침의 장소(삼한의 소도)가 있어서 범죄자들이 그리로 도망을 가기도 한다. 도피성이 이런 곳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고의로 살인한 자에게는 도피성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거룩한 곳은 장소 자체가 거룩해서 범죄자의 죄가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잡아낼 수 없지만 도피성은 장소 자체가 거룩한 곳이 아니라서 실수로 살인한 자(11) 외에는 아무런 보호조치가 없다. 재판을 해서 실수가 아니라고 판정이 나면 도피성이 그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7. 요단 이 편에 9지파 반이 거주하고 저 편에는 2지파 반이 거주하는데 각각 3개의 도피성을 둔다면 불공평하지 않을까?

    도피성의 갯수는 인구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가 도피해야 할 거리에 따라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란 것은 이론이 아니다. 배려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마는 실수라고는 해도 살인한 자를 이렇게까지 배려하시는 분이시다.

8.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도피성에 대한 얘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난 후에 할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급한 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는 7년이 걸린다. 그나마 완전하게 다 끝내지도 못한다. 그런 일을 앞에 두고 그 이후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이후의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9. 보수(報讐)할 자란 보복, 혹은 복수하는 자란 뜻이다. 이 말이 어떤 경우에는 ‘구속할 자’ ‘기업 무를 자’라고 번역이 된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어떻게 복수라는 의미가 있는 걸까?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다: 원래대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기업 무를 자’ 혹은 ‘근족’으로 번역된다(원어는 고엘). 팔아먹은 땅을 다시 사서 원소유자에게 되돌리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의미가 있다. 살인한 자가 보수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도피성은 곧 죽을 죄인을 살게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10. 살인죄를 규정할 때 칼을 어떻게 잡았느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칼날이 손의 위쪽으로 향하도록 잡았다면 실수의 가능성이 있지만(다른 용도로 칼을 쓰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을 찌르기에는 불편한 모양이므로) 칼날이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잡았다면 의도적으로 살인한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어떤 경우가 실수가 아니라고 하는가?

    도구가 철 연장이나, 사람을 죽일만한 돌이나 나무 연장을 사용한 경우, 동기가 미움이나 원한인 경우, 기회를 노린 경우:

11. 어떤 경우가 실수로 살인한 경우가 되는가?

    원한이 없고, 기회를 노린 것이 아닌 경우(보지 못한 채 돌을 던진 경우는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함)

12. 고의가 없이 살인한 사람은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가?

    거주지가 도피성으로 제한된다(25-28).

13. 도피성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감금이다. 자기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가?

    대제사장의 죽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면 속전을 내고 돌아간다(32). 죽어야 할 인생이 누군가 대신 죽지 않고는 용서받을 수 없다. 온 백성의 속죄 사역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의 죽음을 살인자의 피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런 경우에만 속전이 효력이 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없다면 속전도 무용지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예물, 헌신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보여준다.

14. 고살자는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말이다.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와 공통점이 무엇인가?

    의도적인 것: 고의로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나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15. 살인자가 고의성이 없다고 인정을 받아도 도피성에서 나가면 안된다. 용서받은 죄인이 거할 곳은 도피성 뿐이다. 무엇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면 좋을까?

    용서받은 우리(성도)가 안전하게 거할 곳은 예수님 뿐이다.

16.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 왜 땅에 거하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 거하기 때문이다(34).

17. 피가 땅을 더럽힌다? 흡수되거나 묻히면 표가 안날텐데? 그렇게 더럽혀진 땅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또 다른 피를 흘려야 한다? 그러면 더 더러워지는 것 아냐?

    땅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죄를 속하려면 또 다른 죽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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