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4장


1. 발람이 제사를 드리고 취하는 일련의 행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술: 귀신을 불러들이는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 사술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나타나셔봤자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쓴다는 말인가? 자신의 욕심을 포기한 걸까, 아니면 방법을 바꾸려는 의도일까?

2.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았으면 자신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은 발람이 결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벧후 2:15, 계 2:14, 유 1:11, 수 13:22). 그와 비슷한 다른 예를 찾아보자.

    법궤를 벧세메스로 가게한 블레셋 방백들(그 일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을 확인하고 제사까지 드리고 다시 자기 신에게로 돌아간 사람들), 출애굽시의 바로와 애굽인들, 라합을 제외한 여리고 사람들: 영국 사람들이 한국의 불고기를 아주 좋아한단다. 그러면서도 집에 가면 자기들 방식으로 먹는단다. 습관이나 버릇도 고치기 어렵다면 섬김의 대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예수 귀신이 가장 세다고 한단다. 그러면서도 개종을 하지는 않는다. 이건 지조도 충성도 아니다.

3. 발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다(2). 처음 두 번과 어떻게 다른가(23:5, 16)?

    처음에는 입만 주관하셨다: 발람을 말하는 도구로만 쓰시던 하나님께서 발람이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자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면 모든 것이 끝난 것 아닌가? 사울도, 삼손도 이런 경험이 있다(삼상 10:10, 19:23, 삿 14:6). 성령의 (내주하심이 아닌) 충만함은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4. ‘눈을 감았던 자’의 난외주를 보면 ‘뜬 자’라고 돼있다. 어떻게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할까? 도대체 발람은 감은 자야, 뜬 자야? (많은 역본이 ‘뜬 자’로 되어있음)

    감겼던 눈(육신의 눈)이 뜨인(영의 눈) 자(4절 참고): 발람에게는 양 측면이 다 있다. 욕심에 어두웠던 눈이 이제 제대로 뜨인 셈이다. 황량한 광야에 장막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영의 눈이 뜨였기 때문이다.

5. 왜 엎드려서 말을 할까?

    성령의 감동으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이다: 사울이 예언할 때 벌거벗고 누워서 한 것(삼상 19:24)과 같은 현상 아닐까?

6. 5-9절이 축복의 핵심이다. 두 부분으로 나누고 내용을 요약해보자.

    5-7a: 이스라엘의 번영(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 7b-9: 번영의 이유(위대하신 왕이 계시니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으랴?)

7.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란 표현의 원어상 의미는 ‘쭉 뻗은 골짜기 같고’이다. 이 표현이 ‘물 가에 심기운 나무’라는 표현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골짜기는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번영하는 모습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넘치는 통의 물, 많은 물 가에 있는 종자). 물이 귀한 근동 지방에서 이런 장면은 정말 이상적인 곳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도 강이 흐르는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8. 아각은 아말렉의 왕인데(왕의 칭호이면서 개인적인 칭호이기도), 왜 하나님을 아각에다 비교했을까?

    아마 당대에는 가장 영향력이 큰 왕이었을 것이다. 출애굽 시에 처음으로 도전해온 적의 왕이기도 하다.

9. 발람의 마지막 말,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창 12:)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말(창 27:29): 이스라엘이 복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복의 통로이다.

10. 치려면 가슴을 치지 왜 손뼉을 쳤을까?

    화가 나서 손바닥을 쳤다고 번역하는 것이 느낌상 옳지 않을까?

11. 발락의 생각이지만, 발락은 발람을 심히 존귀케 할 수 있다. 발람이 하나님을 잘 부리기만 하면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그걸 막았다. 그래서 화가 났다. 발락이 아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심술쟁이: 발람이 벌 수 있는 막대한 재산을 몽땅 날려버렸다고 빈정대는 셈이다.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노예와 같은 신이다.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나서 주인을 돕는 노예신 말이다. 신에 대한 이런 개념이 지금도 일반적이지 않은가?

12. 발람이 다시 예언을 시작한다. 15-16절이 3-4절과 똑같은지 비교해보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란 표현이 추가 되었음

13. 발람이 예언하는 이스라엘의 장래는 어떠한가?

    이스라엘에 한 별, 한 홀이 나타날 것(17): 위대한 왕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다. 이 왕이 모압과 아말렉을 멸할 것이다. 이 예언은 일단 다윗에게서 성취되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것이며 모압과 아말렉은 메시야에 대한 적대세력을 통칭하는 것이다(에돔이나 세일도 마찬가지).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별을 꽂는 풍습은 이 구절에서 유래했단다.

14. 17절의 ‘소동하는 자식들’이란 표현은 직역하면 ‘셋의 모든 자식’이란 말인데 모압을 가리키는 말로 적대적인 반면에 21절의 ‘가인 족속’은 비교적 우호적이다. 이상하다? 원문을 보면 가인족속이라기보다는 ‘겐 족속‘이다(어원은 동일함). 겐 족속은 누구더라?

    아마도 모세의 처가(삿 1:6, 4:11): 분명하지는 않지만 문맥상으로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15. 발람이 훗날의 역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셈인데(21-24) 한 때 역사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멸망할 두 나라는 무엇인가?

    앗수르와 깃딤: 앗수르가 이 지역에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은 적어도 몇 백 년 후의 일이다. 깃딤은 구브로(키프로스) 섬을 가리키는 말인데 서방에서 페니키아로 오는 모든 배의 중요한 기항지였다. 따라서 ‘깃딤 해변에서’ 온다는 말은 서방에서 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후일에 로마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다(단 11:30). 그 표현이 헬라가 됐던 로마가 됐던 아주 오랜 훗날의 얘기다( 1000년 이상). 한 때 강성하겠지만 다 멸망한다. 반면에 망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는 야곱에게서 나온 주권자의 나라뿐이다(18-19).

16. 발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갔단다. 자기 본향으로 돌아갔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테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참고 민 31:7-8). 왜 미디안으로 갔을까?

    원래 자기를 추천해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뭔가를 노렸을 것: 미디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악한 꾀를 부렸다가 결국은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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