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3장


1. 발람이 그렇게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시는가? 제사의 효력인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어서 나타나셨을 뿐, 발람의 제사의 위력이 아니다: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분이 만나주셔야 만날 수 있다. 발람은 그렇게 하면 신들을 접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는 여호와도 그런 신들 중의 한 분일뿐이다. 제물의 많고 적음과 하나님의 나타나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그냥 사술일 뿐이다(24:1). 제사인가, 사술인가? 예배인가, 주문인가? 인격적인 교제가 있느냐 없느냐로, 내가 주체인가 하나님이 주체인가로 분간할 수 있다.

2. 제사를 드리고 ‘특정한 장소를 찾는 것’은 아마도 자연현상의 변화를 살핌으로 신의 계시를 읽어내려는지도 모른다. ‘저리로’ 가는 데 왜 하필이면 ‘사태난 산’일까(3)? 멀리 가지는 않았을테니 다른 말로 하면 어딜까? (9절을 참조)

    산 꼭대기: 산사태가 나서 벌거숭이가 된 지점, 즉 높은 곳을 가리킨다. 특정한 장소를 찾는 이런 방식이나 태도는 이교적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방식이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방법이나 제사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나서 되는 일이라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할 터인데...

3. 발람은 하나님도 불러냈으니 자부심이 대단했겠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불러냈다고 생각하는가?

    일곱 단에 수송아지와 수양들을 드린 것(4): 참으로 가소로운 생각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 중에 자신들의 수고와 봉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성도는 최선을 다 하고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전 15:10, 빌 3:13). 봉사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다(갈 2:20).

4.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8) 이 말은 발람의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발람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친히 모압 왕에게 말씀하시면 일이 더 쉬울텐데? 하나님은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사람을 귀하게 만드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5. 발람의 노래(7-10)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 몇 가지인가?

    8번: 발락이 =모압 왕이,
    아람에서 = 동편 산에서,
    야곱을 저주하라 =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바위 위에서 = 작은 산에서,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6. 저주대신 복을 말할 수밖에 없는 발람이 ‘이스라엘은 홀로 처할 것이라’고 했다(9). 이게 어떻게 복일까?

    필적할 상대가 없다는 뜻: 열방 중의 하나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정말 이스라엘은 특이한 존재다. 고대의 대제국들이 다 사라진 후에도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 살아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아직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이며, 경제나 학문적으로는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7. 일반적으로 티끌은 보잘 것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무슨 의미일까?

    셀 수 없이 많은 것, 곧 번성(참고 창 15:5, 17:20, 28:14). 9절이 질적인 번영이라면 10절은 양적인 번영이다.

8. 웬 ‘4분지 일’ 인가(10)? 발람이 높은 곳에서 이스라엘의 진영을 다 훑어보았다는 점을 감안해서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진영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한 부분의 번영만이라도 셀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전체 이스라엘의 번영은 어떠하겠는가!

9.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을 보고 있노라니까 문득 자신도 그런 복을 누리고 싶어진 걸까? 발람이 누리고 싶은 이스라엘의 복이 무엇인가?

    행복한 죽음(10): 아무리 잘 죽어도 그렇지 죽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저렇게 죽고 싶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스라엘이 죽음 뒤에 누리는 행복마저 본 것일까? 의인이 죽음 뒤에 누리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그런 말이 나올만도 하다.

10. 발락의 생각은 ‘장소를 바꾸면 발람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건가(13-14)?

    장소보다는 보는 대상의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이다: 이스라엘 전체 모습을 보고서는 기가 질려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끝만 보이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나님 때문에 저주하지 못한다고 말을 해도 발락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처방을 구한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해석이나 생각으로 행동하는 성도도 적지 않다.

11. 번제물 곁에 서서 발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발락과 귀족들(15)! 기다려봐야 헛일인데? 이들이 왜 이렇게 허무한 인생일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 인생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없이 행하는 그 모든 일은 허무한 것이다. 모래성일 뿐이다. 과학이 위대한 문명을 낳았다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지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12.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이렇게 귀한 말씀을 되도 않은 술사를 통해서 주시나?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삼상 15:29보다 더 명문이다. 이보다 더 귀한 말씀을 이런 식으로 주신 다른 예가 또 있을까?

    원시 복음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메시야에 대한 언급(창 3:15)이 그렇다: 사단을 저주하시는 과정 속에 이 놀라운 복음이 숨겨져 있다.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놀라운 약속이 형식상으로는 아담이나 하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책망받을 욥의 친구들도 놀라운 말을 많이 남겼다(욥 4:17, 8:5-7, ...).

13. 하나님에게 후회가 없으시다고(19)? 하나님께서도 후회하시던데(삼상 15:35)? 한탄도 하시고(창 6:6)?

    동명이의어(homonym)나 마찬가지다: 단어는 같아도 의미는 다르다. 후회가 ‘잘못을 깨우치고 행위를 돌이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에게는 후회가 없다(19, 롬 11:29). 사울을 폐한 것이나 홍수심판처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 아픈 마음을 가리켜서 후회(한탄)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을 향한 본래의 뜻(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은 결코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았다.

    단순하게 마음이 아프다는 뜻의 후회는 있어도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후회는 절대로 없다. 사울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아픔은 있지만 왕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의도에 대한 취소는 없다. 홍수로 온 인류를 멸할 수밖에 없는 아픔은 한탄이지만 그렇다고 인류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후회가 없으심이다.

14.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느 쪽이 더 좋은가? 가령, 결혼하기 전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잘못이나 실수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 중에 누가 나을지 생각해 보자?

    둘 다 똑 같다: 허물이 많은 사람에게는 최고의 남편이요, 최고의 아내다.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여신 분이시다.

15. 식언치 않으시고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그 분이 우리의 왕이라면 ‘왕을 부르는 소리’란 표현(21)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왕을 좋아해서 질러대는 환호성: 식언치 않으시고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왕이라면 이런 환호는 당연한 것이다.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절대적 인기를 누리시는 분이시다. 발람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계시하셨건만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16.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물을 설명하려고 그릇에 담는 순간 물이 지닌 많은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하나님을 그 무엇에다 비유한다는 것 자체가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들소와 같은가(22)?

    당할 자가 없다: 이 들소는 가축으로 길들여질 수 없는 짐승이란 뜻이다(욥 39:9-12). 이런 들소에게 어떤 굴레나 멍에를 씌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제어할 수 있는 사술도 없고, 복술도 없다! 그런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온전치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겨우 이 정도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

17.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사자와 같은가?

    포기할 줄 모르는 점에서: 힘과 영광과 위엄을 가진 것(=일어나서)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하기 전에는 눕지 아니한다는 것은 마음먹은 것을 반드시 완성하다는 뜻이다.

18. 발람과 발락은 완전히 Dumb and Dumber다(영화 제목). 이걸 우리말로 뭐라고 하지? 바보형제? 바보와 천치? 발락과 발람 중에 누가 더 바보인가?

    발람: 발락은 아예 모르는 바보이고, 발람은 알면서도 바보의 말을 듣고 바보짓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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