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장


1. 미리암이나 아론이 죽은 것은 출애굽 초기일까, 말기일까(참고 33:38)?

    말기: 아론의 죽음이 출애굽 40년 5월 1일이므로(33:38) 미리암도 그 해 초에 죽은 셈이다. 그러면 가데스에 거했다는 것은 38년 전 광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바로 그 한 맺힌 장소에 다시 왔다는 뜻이다.

2. 물이 없다고 공박하지 말고 물을 구해달라고 요청을 하지?

    원인이 물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기나긴 방황에서 오는 좌절감이 근본 원인인데 그것이 물 부족을 기화로 터져나온 셈이다. 40년 가까이 무료하게 방랑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가는 길이 때로는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면서 포기할 때를 훨씬 지날 때까지 주시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 주셨다.

3.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는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특정한 때가 아니라 가데스바네아에서 반항하던 20세 이상의 구세대가 광야 노중에서 죽은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투의 말이다.

4. 같은 지명이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다. 가령, 지형적 특성을 따라서 ‘산양’ ‘얼음골’ 같은 표현들이 산재할 수 있고, 외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에 같은 지명이 생겨나기도 한다. 캠브리지는 미국에도 여러 군데 있고, 캐나다에도 런던이 있다.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길에는 어떤 지명이 중복되게 생겨났는가?

    므리바(다툼): 르비딤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 그 곳을 므리바라고 부르더니(출 17:1-7) 또 이러는 바람에 가데스 근방에도 므리바라는 곳이 생겼다. 잘 하면 가는 곳마다 ‘므리바’를 양산하게 생겼다. 지나가는 길에 좋은 이름을 남기면 어디가 덧나나?

5. 죄인을 다루는 사람들은 말을 일부러 고약하게 한다. 있어야 할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다 팔아 먹었어?’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누군가가 치워놓았을 물건에 대해서 그렇게 못되게 묻는 것은 상대를 아예 죄인으로 취급하는 못된 버릇이다. 이스라엘이 이런 못된 소리를 하는 예를 든다면?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4): 죽게 하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은혜를 이런 식으로 폄훼하는 것은 정말로 죄가 많다.

6. 악한 이스라엘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5):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그러니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보이는 것이 없었을까? 살아있는 자체가 은혜였을텐데... 떠나지 않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회막, 모세와 아론(어떻게 이런 지도자를 만나서?), 날마다 내리는 만나, 헤어지지 않는 옷과 신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기다리고 있는데... 도대체 무얼 보는가?

7. 하나님의 명은 어떻게 물을 내라는 것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바위에게 명하라(8): 마치 홍해를 가르던 것과 같은 방식(바다를 향해서 지팡이를 내미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쳐 버렸다. 성질을 내면서! 호렙산에서는 바위를 치라고 하신 적도 있으니까(출 17:6) 치는 것이 꼭 잘못이 아닐 수도 있는데?

8.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 말도 성질이 많이 돋은 상태임을 보여준다. ‘패역한 너희여’라는 말은 ‘야, 이 반역자들아’라는 말이다. 비록 백성들이 그랬을망정(참고 시 106:33) 모세는 화를 내지 말아야 했는가?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한 모세(민 12:3)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라!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그렇게 무서운 죄일까?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인데 한 번만 치지 않고 두 번이나 쳤으니? 그렇게 해석하기도 하는 모양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죄는 크다. 가령, 목사나 장로가 예배 중에 화를 내거나 싸우는 일이 이런 것에 해당되는 것 아닐까?

9. 그렇다고 40년 동안 백성들을 이끈 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면? 도대체 누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모세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숨은 의도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3:28, 갈 3:24-25):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고, 여호수아는 은혜의 상징이다. 이 때 바위를 두 번 치지 않았더라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갔을까? 아니다, 모세는 어떤 이유로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본인에게는 억울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구원역사에서 맡은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가나안에(진짜 가나안의 하나님의 나라) 바로 갔다. 변화산에 당당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라!

10. 에돔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형제인가?

    에서의 후손이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 가 있는 동안 에서의 후손도 세일산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창 36장).

11. 모세가 얼마나 정중한 태도로 요청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불쌍한 동생을 좀 도와달라는 투: 에돔을 형제로 부른다면 자신들은 동생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애굽에서 고생한 것 알지 않느냐?’는 것은 우리 처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더구나 ‘우리 힘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는 것은 싸울 힘도 없다는 뜻인 셈이다.

12. 겁도 없이 ‘왕의 대로’ 로만 통과한다고(17)?

    고유명사이다(=19절의 대로): 큰 길로만 지나가면서 일체의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왕의 대로’란 다메섹에서 아카바 만까지 요단 강 동쪽 땅을 남북으로 달리고 있는 고대의 유명한 통상로이다. 동방 연합군은 이 길을 남하하여 사해 저지의 성읍을 침략하였다(창 14장). 이 도로는 오늘날에도 ‘술탄로’로 불린다. 이슬람 용어로 바뀌었을뿐 뜻은 그대로다.

13. 지나가기만 하겠다는데 꼭 이렇게 적대적이어야 하는가? 에돔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대군이 어느 순간에 폭도로 변해버릴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에돔 왕이 현명한 셈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끊임없는 징계를 당하게 된다(왕상 11:15-16, 왕하 14:7, 렘 49:7-22, 옵 1장): 지도자의 선택은 어려운 법이다. 한번은 십자군이 집결지를 콘스탄티노플로 정하고 모여들었는데 감당하지 못할만큼 많은 수가 모였다. 이들이 어느 순간에 폭도로 변해버리면? 그런 면에서 일단은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인데 후일의 역사를 보면 아니다.

14. 므리바 물에서 사고를 친 것은 모세인데? 아론도 함께 열을 냈나? 그렇다고 해서 아론까지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하나? 그것도 먼저?

    모세에 대한 징벌이 사실은 벌이 아니듯이 아론도 마찬가지다. 이 때 아론의 나이는 123세다(33:39). 돌아가실 때가 됐다. 다른 동년배들에 비해서 훨씬 오래 살았다. 백성들을 훈계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본다. 회중의 목전에서 산을 올랐는데(26) 죽어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므리바 물과 같은 사건을 다시는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15. 에돔은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는데 그냥 밀고가면 안될까?

    그래도 되겠지만 모세는 우회하는 길로 갔다: 에돔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다. 존중해야 한다. 성도가 저지르는 많은 잘못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밀어붙이는 것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힘이 생긴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서 욕을 먹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작정했지만 환관장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관장 밑의 감독자에게 가서 좋은 말로 청원한 것을 보라. 지금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이다.

16. 이 장에 들어와서 느닷없이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을 얘기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세마저 죽는다. 출애굽의 가장 중요한 영웅 세 사람이 가나안 직전에서 다 죽는다. 어떤 느낌인가?

    이들은 진정한 출애굽의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끝까지 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다. 정말 귀하게 사역을 했고, 어려운 일들을 잘 감당했지만 진짜 주인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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