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6장


1. 고라가 반역의 주동자였던 모양이다(5). 그는 모세와 사촌지간이고(출 6:16-21) 성막 봉사와 교육을 맡았다. 그런데 왜 반역을 일으켰을까? 다른 세 명은 르우벤 지파다. 반역에 동조한 이유가 있을까? 구체적인 이유는 다르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같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잊은 것이 주원인이다: 모세가 세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출 19장)임을 잊은 탓이다. 인간적인 면만 본다면 사촌지간에 특별히 더 나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나라고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아론의 자리를 노렸을 것이고, 르우벤 지파 사람들도 본래는 자신들이 장자니까 조상의 실수로 빼앗긴 장자의 지위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타난 현상, 즉 사람만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졸면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전방에서 보초를 서는 것도 몇 달이 지나면 만성이 된단다. 아무리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하더라도 온통 기적 속에 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 기적도 너무 잦으면 일상이 되는가? 끔찍한 적응력이여! (출 6:16-21을 정리하면 족보상으로 레위, 고핫, 이스할, 고라가 되고, 또,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가 된다. 그러면 고라는 모세의 4촌이다.)

2. 반역자들의 말이 어디가 문제인가?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은 문제없다. ‘스스로 높이느뇨?’가 문제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닌데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여호와께서 백성 중에 계신다는 것은 알면서 그 분이 이렇게 세우신 것은 왜 모를까? 엉뚱한 욕심에 눈이 멀면 뻔한 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때는 명백한 표시를 낸다(요단강이 갈라지게 하는 것). 모세도 그랬지 싶은데?

3. 이 정도의 무리가 들고 일어나면 당장 어떻게 해야 하나? 친위대가 있어서 막아낼 형편도 아니고?

    하나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다(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막 10:42-43). 군인들을 동원해야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위가 아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억지 권위일 뿐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모세가 일어나 당당하게 외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답을 주신 모양이다.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경호원을 대동한 목사? 타락해 가는 교회의 상징이다.

4. 모세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을까?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자가 누구냐? 누구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느냐?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아온 자가 누구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달라고 누가 기도했느냐? 등등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대답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반역자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싸워봤자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안타깝지만 교회 안에도 이렇게 할 말을 다 하면서 당당하게 싸우는 분들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야 하고, 응답이 없으면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5.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위한 방법이 하필이면 향로일까?

    고라가 노리는 것이 제사장직인 것을 알았기에 제사장이 하는 일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시험을 치르게 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아니 받으실지 보자는 것이다. 이러다가 죽은 사람이 있는데도...? (레 10:1-3)

6. 제사장이 되는 것(10)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게 하신 것(9) 중에 어느 것이 더 욕심이 나는가?

    그 정도의 은혜를 입었으면 문지기를 시켜도 감지덕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옳다(시 84:10). 구원받은 것만으로 감격하여 무슨 일이든지 순종하며 봉사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이다. 어떤 자리보다 이런 감격이 우선이다. 9절은 교회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이다. 아니, 목사, 장로가 교회에서 높은 자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이다.

7. 아론이 어떤 사람인데(11)?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출 16:7-8): 그래서 아론에게 함부로 대들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러라고 7일간이나 성대하게 위임식을 치르게 했는지도 모른다(레 8:1-9:24). 흉이야 있다. 말은 잘 하지만 한 때 백성들의 강권에 못 이겨 금송아지를 만들기도 했고,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힐난하기도 했다. 자식 둘을 잘못 키워서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말았다. 이런 저런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래서 함부로 제사장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8.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지 다단과 아비람은 왜 오지도 않는 거야?

    아예 순종하지 않겠다는 뜻: 하나님 앞에서 어떤 판결을 받기도 전에 모세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네가 뭔데 우리더러 오라 가라는 거야?’ 뭐 이런 식 아니었을까?

9. 다단과 아비람의 말 중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고약한 부분이 있다면?

    애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1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특별히 고른 땅을 무시하고 어떻게 애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가? 완전히 반항이다. 그 외에 ‘출애굽의 목적은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라고 하는 것도 억지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방황도 처음에는 자신들이 잘못으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차츰 원망으로 바뀐다. 자신들의 잘못은 흐려지고 원망은 커지고...

10.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굳이 양심선언(?)을 할 필요가 있나(15)?

    다단과 아비람의 말로 인해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남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다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어디 이 일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줄 아는 모양이지? 못 한다고 발을 얼마나 뺏는지 알기나 알까? 지도자 노릇하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인 모양이지? 속이 곪아 터지는 줄도 모르고?

11. 그렇게 많은 향로가 있었나?

    성전에서 사용하던 향로가 아니라 각자 개인이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집에 화로를 쓰던 것을 가져왔던지...

12. 겁도 없이 자의로 향로를 가지고 회막문에 섰다(18)? 이 곳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나타내시는 곳(출 33:9-10),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잡는 곳(출 29:11, 42, 레 3:2, 4:4):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은 복을 주시든지 아니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회막문이 바로 그런 장소다. 겁도 없이 자의로 향로를 들고 이곳에 선다는 말이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은 것도 잊어버렸다는 말이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겁나는 짓도 예사로 할 수 있다!

13. 온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신 적이 벌써 몇 번 째인가?

    세 번째: 시내산에서(출 32:9), 가데스바네아에서(민 14:12), 여기서(민 16:21), 진짜 이스라엘을 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은근히 모세가 말리기를 기대하시는가? 하나님은 로보트나 절대적인 전제군주와 같은 분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분이다. 인간의 표현대로 하면 종종 마음을 바꾸셨고, 물리기도 하셨고, 대속도 하셨다.

14. 대상 6:37. 9:19에 보면 고라의 자손들이 성전에서 귀중한 직책을 맡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는가?

    고라는 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7). 그래서 고라의 아들들은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다(26:11). 그러므로 32절은 가족이 아니라 동조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15. 모세의 말대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징계가 임했음에도 어떻게 이것이 모세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감정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감정대로 움직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을 때 아론은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은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모세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을까? 그랬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16. 땅이 갈라졌다는 것은 지진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데 혹시 죄가 없는데도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을까?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지진이든, 불이든(레 10:1-2), 우박이든(수 10:11) 징계의 대상을 선별적으로 가려낸다. 땅이 반역자들을 삼키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것(34)은 쓸데없는 두려움이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도망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심판의 대상이 아니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17. 향로는 거룩하다(37)? 그 향로에 불을 담아 바친 사람은 징계를 받아 죽었을망정 향로는 거룩하다? 도대체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거룩’하고, 제사를 드리고 남은 부분 중에서 제사장에게 주는 부분은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를 참고하자)

    아무나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구별): 일단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므로 구별된(특정한) 용도로 쓰시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기껏 경고용, 혹은 학습용 재료로 쓰셨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론 대신에 엘르아살에게 이 일을 맡기신 것 같다. 절대 성결해야 할 대제사장이 손을 대기에는 부정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무시하다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이튿날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니? 도대체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백성들의 눈에는 고라와 다른 무리들의 반역은 눈에 잘 안 보이고, 땅이 그들을 삼킨 것만 보인다. 매 맞은 아이가 매 맞은 이유보다는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어제 일인데? 기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불기둥, 구름기둥, 만나)도 보이지 않는다. 기적이 일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오늘날에도 날마다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성도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비슷할까?

19.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을까? 대제사장을 현장에 보냈다. 일종의 시위다. 대제사장이 향을 들고 심판의 현장에 뛰어든 것은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는 셈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백성을 위해서 예물을 드리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라는 식이다(레 16:12-13).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를 식혔다. 후일 심판 때에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나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내가 대신 죽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의 분노가 사라지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향로를 들고 선 아론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는 그림자다. 이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아론의 제사장직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가 향을 피우면서 집례를 행하는 것이 이런 모습에서 유래한 것 아닐까?

20. 순식간에 14,700명이 죽었다.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얼마나 남았을까?

    그래도 늘었다! 하나님의 은혜다! 두 번의 인구조사 결과를 비교해보면 조금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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