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4장


1. 어떤 유명한 목사님께서 14:1~13절을 본문으로 해서 ‘부흥의 비결’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대지는 ‘1) 적극적인 사람이 되라, 2) 비전을 품으라, 3) 지도자를 신뢰하라’였다. (어이가 없지만) 각각의 대지를 어느 구절에서 찾았을까? 그리고 비판한다면?

    1) 12절: 추측인데 ‘좌절하고 포기하는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신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고 설명한 모양이다.

    2) 8-9절: 갈렙의 말에는 전혀 이의가 없다.

    3) 4절: 도대체 누가 신뢰해야 할 지도자인가? 한 장관인가, 모세인가? 아마도 이런 짓을 하지 말고 모세에게 순종하라는 것 같다.

    비판) 부흥에 관해서 설교하려면 부흥의 내용이 담긴 본문을 택해야 한다. 징계 받는 장면에서 반대로 부흥의 비결을 말하다는 것은 공부 못해서 낙방한 학생들에게서 성공의 비결을 찾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면 실패하는구나’ 해서 반대로 하는 유익은 있겠지만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위의 구절에서 이런 대지를 뽑아내는 것이 논리적이지도 않다. 12절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아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2. 정말 ‘온 회중’이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 ‘곡’을 했을까? 그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까?

    군중심리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주의해야 한다. 1절의 표현은 엄청나게 강조된 표현이다. 거대한 홍수처럼 불신의 물결이 온 회중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거대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시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혼자서라도!

    역으로 분위기를 잘 잡아서 헌신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부흥회나 선교 세미나 같은 데서! 분위기를 돋우어 흥분한 상태에서 서원하게 해야 효과가 있다? 집에 돌아가서 찬찬히 생각해보고 가족과 의논하라고 하면 결과가 영 신통찮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족을 버리라고(?) 하셨는가? 만약에 이런 것이 옳은 방법이라면 예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셨을 것이다. 기적을 체험하고 구름떼 같이 모인 사람들을 동원해서 교회를 세우거나 로마와 싸웠더라면 얼마나 간단했을까?

3. 백성들은 툭하면 죽음을 운운했다(1-2).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서운하게 하는 말인가?

    죽음에서 건져낸 은혜를 잊어버린 말이기 때문: 유월절, 홍해도하, 만나, 반석에서 물을 낸 것 등을 업신여기는 처사다. 목숨을 바쳐 구해줬더니 덜렁 죽어버렸다면 구해준 사람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이스라엘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도 이해 못할 일이다(11). 이적을 수없이 보고도 믿지 않는다?

4.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살짝 야단을 쳤더니 ‘그렇게 때리려고 날 낳았어요?’ 하면? 살이 너무 쪄서 밥을 조금 적게 줬더니 ‘굶겨 죽이려고 날 낳았어요?’ 하면 아마 속이 다 뒤집히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면?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고(3):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이렇게까지 곡해할 수 있을까? 말끝마다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가! ‘심판하려면 왜 인간을 만드셨나요?’ 하는 질문도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비슷한 질문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빨리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

5. 만약에 말이지만 그래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가서 뭐라고 말하려고? 다시 종으로 받아주라고?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사탄의 손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다시 사탄에게 돌아가는 것도 이런 형국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한번 비췸을 받고 다시 타락한 자들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히 경계하였다(히 6:4-6). 초대 교회 시절에 이런 위험에 처한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6. 모세와 아론이 왜 엎드렸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담대하게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장소는 회중 앞이지만 회중에게 엎드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엎드린 것이다. 싸워서 될 일이 아니다. 여호수아나 갈렙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모세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7. 우리는 누군가가 옷을 찢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인들은 옷을 찢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비통해서 마음을 찢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울고불고 하던 자들이 멈칫 해서 주목할 수 있다. 마치 누군가 ‘Help me’ 하면 한국 사람은 그렇게 위험을 느끼지 못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위급한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낌이 전혀 다르다.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마음을 찢는 결단이 필요하다.

8.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기에 이것은 그 땅 백성과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문제인가?

    우리의 보호자와 그들의 보호자와의 문제다. 우리가 나서서 ‘되니 안 되니’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처럼 비싼 식당에 아이들을 데려갔더니 ‘아빠 돈 있어?’ 한다. 걱정스러워 하는 말이다. ‘걱정 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돈을 지가 내냐?

9.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믿음을 가지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그냥 믿는 수밖에!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가? 어떤 증거를 제시해서 될 일도 아니고 논리적인 설명으로도 이적으로도 되는 일이 아니다. 온갖 이적을 체험하고도 이렇게 속 터지는 소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이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믿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앞에 놓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는 셈이다. 빨리 자신을 던져 확인해보는 것이 최선이다. 믿고 들어서면 확신이 선다. 모세조차 등 떠밀려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던가!

10. 아담의 범죄, 노아 시대의 범죄, 여기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각각의 심판에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끝장을 보지 않았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인류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회복되기까지 엄청난 저주 아래에 놓였다. 노아 시대의 범죄로 모든 것이 끝나야 할 판이었지만 노아를 통해서 끈을 이어가셨다. 이제 이스라엘을 전염병으로 멸하려 하시지만 그래도 다른 민족을 준비하시겠단다.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탓이다.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로 만드셔서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11. 모세의 중보기도가 위력적인 이유를 두 가지만 든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기도(13-16), 말씀에 근거한 기도(18-19): 결과적으로 백성들을 위한 것이지만 한 마디도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하지 않는다. 글쎄, 불쌍하게 여길 가치도 없는 걸까? 아니, 실제로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달라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오직 이유를 하나님에게서만 찾는다. 모세가 영악스러운 건가?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한다.

12. 모세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큰 권능이란 무엇인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죄를 사하시는 인자: 다른 능력이 아무리 많은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권능이시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능력(13, 17)이 나타나 있지만 모세는 바로 이 능력에 기대어 호소하고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표현은 성경에 많이 나온다. 최초의 이 표현은 출 34:6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세는 그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잘 쓰고 있는 셈이다.

13.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는 얘기는 왜 하는가?

    ‘하나님께서 무골호인처럼 그렇게 허약한 분이 아니라는 것(=공의로우신 하나님)도 잘 압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용서해달라는 것이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처지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14. 사하노라고 하고선 또 벌을 주잖아? 아담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아담이 용서를 받지 못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다. 모든 것이 끝이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벌을 받았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뜻이다. 아담이 받은 벌은 달리 보면 회복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은 끝장이 나야할 시점에서 끝내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여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일부는 약속한 땅을 보지 못하지만 구원역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다윗의 범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지만 다른 벌은 받았다. 그 벌이 가볍지 않았다. 다윗이 그 벌을 기꺼이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만 믿고 함부로 하다가는 매를 맞을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함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을 수도 있다.

15. 하나님은 무엇을 걸고 맹세를 하시는가?

    하나님 자신(21): 다른 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증해 줄 수 없다. 그 분 자신이 최상의 가치이므로! 나름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는 사람도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16.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단다. 진짜 열 번이나 시험했는가?

    ‘철저하게’ 란 뜻이다: 열 번의 회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10은 완전수라고 한다. 완전하게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악착같이 찾아본다면, 노역의 가중(출 5:21-6:9), 홍해(출 14:11-12), 마라(출 15:23-24), 신 광야(출 16:2), 만나(출 16:20, 27), 르비딤(출 17:1-3), 금송아지(출 32:1-6), 다베라(민 11:1), 기브롯 핫다아와(민 11:4-23), 그리고 여기 가데스 바네아 등이다. 시험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만 문자대로 읽어도 별로 틀림이 없다. 오히려 이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

17. 그러면 가나안 땅에는 갈렙 혼자 들어가야 하나?

    여기서 ‘갈렙’은 ‘일반적으로 보면 죽어야 할 대상이지만 죽지 않을 사람’을 의미한다: 징계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람에는 20세 미만, 레위지파, 여호수아, 모세(아직은 자격이 있음), 아론(다른 일로 죽지 않는다면), 엘르아살 등이 있다.

18. 25절을 주목하자. 이 구절만 떼내어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기 때문: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회군시켰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코미디가 된다. 문맥을 무시하고 글자에만 매달리면 이런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굳이 따지자면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기 때문’ 이라는 말은 백성들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너희 말대로’ 해라는 식이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종종 ‘말한대로’ 갚으시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소망이 담긴 말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28)! 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바야흐로 광야로 바뀌는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말은 2절이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20.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신 것을 잘 기억한다. 정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심판이 아니다. 아니, 설령 심판을 기억한다고 해도 심판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 중에 가장 잘 기억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27): 심판하지 않으시려고 참는 데까지 참았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참고 참으신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

21. 나이가 죄인가? 20세가 안된 젊은이들 중에 하나님을 원망한 자는 없었을까? 어른들이 이런 분위기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도 같은 짓을 하게 마련인데, 나이가 적다고 봐준 걸까?

    이들을 전부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끝까지 반항하고 거역하면 징계를 받겠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0세 미만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철이 없어서 용서해 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자기가 잘 나서 잘 먹고, 잘 사는 줄 아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어서 오늘도 그렇게 팔팔한 줄 알아야 한다.

22.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리하게 된 근거는 불순종이다. 그러면 그 기간이 40년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나안 땅을 40일간 탐지하였기 때문?

    다음 세대가 자라날 기간(성장),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되어야 할 기간(교육, 훈련)이 필요하다: 불순종한 이 세대를 단번에 멸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렇게 해서 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는데 한 민족이 연대의식을 가지게 되는 데에도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단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은 40년이 필요하셨고, 그래서 40일 간의 정탐날자와 상징적으로 연결하셨을 것이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앞으로 38년 조금 넘는 기간이다. 지나간 1년 2개월 정도를 포함해서 40년이다.

23. 10명의 족장(두령)들의 명단이 발표될 때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13:4-15)?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죽고 말았다. 명색이 부족의 대표인데 그렇게 잘 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셈이다. 차라리 잘 나지를 말든지... 인물 좋고, 집안 좋고, 돈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경고하는 성경말씀이 어떤 것이 있는가?

    아굴의 기도(잠 30:8-9), 많이 선생되지 말라던 야고보의 교훈(약 3:1):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좋은 것도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시키면 결국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24. 산꼭대기로 올라갔다는 것은 산지에 있는 적과 싸우러 간 것이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데?

    청개구리다: 선고가 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지. 싸우러 간다고 되는 게 아니다. 차라리 회개부터 했더라면 어떨까?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우선이다. 그게 안된 상태에서는 자신의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으라. 돈이나 힘으로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25. 순종없는 열심?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 이것 참 머리 아프다. 이런 사람들이 즐겨쓰는 단어를 하나 찾는다면?

    그래도(44): 고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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