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장


1. 일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육도 받고 훈련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악한 말로 원망할 수 있었을까(1)?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 같지만 사람은 그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감히 그럴 수가?’ 그럴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도 그랬는데 하물며 내가 베푼 작은 은혜쯤이야.

2. 물이 없는 광야에서 불이 나면 뭘로 끄지?

    광야든, 호수가든, 하나님께서 지르신 불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의 눈에는 자연현상으로 보이든지, 누구의 실수로 보이든지 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싶으면 하나님께 엎드려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일이 있을까? 결국은 범사에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가 복되다.

3. 하나님께서 조준을 잘 못하셨나? 왜 진 끝에 불을 지르셨지? 한 가운데를 확 싸질러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철저한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경고만 하시겠다는 뜻이다. 시늉만 할 때 잘 해야 하는데...

4. 이전에도 비슷한 불평이 있었다.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그랬다(출 15:24, 16:2). 그 때는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진노하실까?

    그 때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상태였다면 이제는 알만한 상태에서 해서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문자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물을 사람에게는 더 엄격하게 물으신다. 맡긴 달란트대로 요구하신다. 많이 받은 자의 책임은 더 무겁다.

5. 불이 나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또 먹는 문제로 울고불고?

    어린애니까: 문제는 언제까지 이렇게 어린아이 노릇을 하느냐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결코 성숙한 어른 노릇을 하지 못했다, 잠간만 제외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그 뜻을 따라 살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쳐주셨다!

6. 일부가 탐욕을 품은 결과 모든 이스라엘이 동조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그런 생각이 있기는 했겠지만 생각이 현실화되는 데에는 몇몇 주동자가 있어야 한다. 주동자만 없으면 괜찮을까?

    아마 또 다른 주동자가 생길 걸: 구제불능이란 얘긴가? 조금 더 참고 기다렸으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을까? 조금의 인내가 부족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부부사이에서도 ‘청소를 좀 해줘야겠구나’ 하고 일어서는데 부인이 ‘여보 청소 좀 해줘’ 이러면 그만 하기 싫어지는 경우가 많다. 딱 한 박자만 늦추면 일이 저절로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도 미련곰탱이 같이 기다릴 수는 없는 걸까?

7. 만나 외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6)? 메추라기는 출 16:13에서(1년 2월 15일) 오고 끊어진 모양이다. 그러니까 1년이 조금 더 지났다. 일 년 동안 만나만 먹었다. 불평할만 하지 않은가?

    애굽에서 먹던 것만 생각하니 그렇다. 만나가 날마다 내리는 것도 기적의 연속이다. 기적도 계속되면 단순한 일상인가 보다. 비록 자극적인 양념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푸신 완전식품이었을텐데... 그것마저 없는 경우와 비교해보면 감격스러울텐데...! 애굽에서 먹던 것을 생각할 게 아니라 종살이 하던 것을 생각해야 하고, 만나만 주는 것에 대한 불평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데 봐야할 것은 못 보고, 가볍게 여겨도 될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보다. 메추라기는 여기서 다시 언급되고는 또 끝이다! 기적의 끝에도 만나만 언급된다(수 5:12).

8. 애굽에 있을 때는 정말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었을까?

    종살이 하면서 얻어먹은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몸으로 때운 것도 값을 지불한 거지.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낫더라는 거지?

9. 밤에 이슬처럼 내린 만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먹었단다. 햇볕이 뜨겁게 쪼이면 녹아버렸다고 했는데(출 16:21) 어떻게 삶을 수가 있었을까? 그늘에서만 먹었을까?

    아침에 늦게 나가면 구할 수 없도록 녹게 하셨지만 요리해서 먹을 때는 녹지 않았다. 만나가 날마다 내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게으른 사람은 구할 수 없게 하신 것도 기적이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하루를 넘겨도 상하지 않는데 평일에는 하루를 넘기면 상하는 것도 기적이다(출 20:19, 24). 항아리에 담아서 법궤에 보관한 것도 상하지 않았다.

    결국, 만나는 훗날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상징이다. 질린다고? 예수님을 떡으로 여기고 먹는 자는 비록 육신이 고달프고 힘든다고 해도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지 깨달아야 한다. 질린다는 말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10. 하나님도 참 답답하시겠다. 모세마저 이 모양이니. 대통령도 ‘못 해 먹겠다’고 하고, 영화 얘기지만 (Bruce Almighty 던가?) 하나님도 휴가를 가야한단다. 성질 같으면 그냥 내던져버릴 텐데? 모세가 고기를 구해다 먹이는 문제로 불평을 해댔더니 무슨 소득이 생겼는가?

    조력자들을 주셨다. 이렇게 불평을 해도 야단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르니 온갖 녀석들이 다 도전을 하지! 혼자서 모든 문제를 다 짊어지고 가는 것은 이처럼 위험하다. 적절하게 일을 분배하고 책임도 어느 정도 분산해야 한다. 책임이 중한 줄도 모르고, 책임질 생각도 않으면서 모든 짐을 혼자서 다 지고 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11. 모세에게도 짐이 과했던 모양이다. ‘이게 어디 내 백성입니까? 내가 낳았습니까?’ 이렇게 불평을 해도 하나님께서 달래기만 하셨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가장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헌신적으로 사역하다가 지친 목회자나 선교사들 아닐까? 한번쯤 이런 푸념도 늘어놓을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사람에게서 최종적인 위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한다. 일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백성을 인도하고 있는 것은 모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을!

12. 성경에서 ‘그만 날 죽여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

    욥, 모세, 엘리야, 요나: 욥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 요나는 한 방 맞을 소리를 한 것이다. 또, 구약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이(변화산에 나타난 것을 참조) 그랬다. 위대한 사역자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한국의 유명하고 능력있는 목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경력이 있다던가? 이런 고난을 겪지 않으면 신앙의 성장은 불가능한가? 스스로 하나님의 훈련장에 자신을 던지는 자가 복되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13.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가장 속 터지는 소리는?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 실컷 고생해서 구해놨더니 하는 소리 봐라.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놔라 한다더니!

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조력자를 70명이나 붙여 주셨다. 그들을 가리키는 말 중에 ‘네가 아는 자’란 말(16)은 무슨 뜻일까?

    70명에 대한 선발권한을 모세에게 위임하셨다는 뜻: 하나님께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일을 맡기신다. 자신의 선택권을 깨끗이 반납하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라고 기도하는 분도 적지 않다. 하긴, 그게 편하기야 하지!

15. 고기를 달라고 불평 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고기를 냄새가 나도록 먹여서: 하나님의 징계 방법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와 관련이 많다. 선지자가 전해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어거지를 부리는 자들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외군 군대를 동원해서) 심판을 행하셨다(사 28 장).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 가급적 희망적이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징조를 구하라’는 데도 끝까지 거부하는 아하스에게는 ‘놀라운 징조를 주심으로’ 징계하셨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혀 가게하심으로 그 땅을 안식케 하셨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거부하면 다른 주인을 섬기게 하신다.

16. 모세도 아직은 더 성장해야 하는 모양이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나게 체험했을 텐데,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바다를 가르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능력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건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만이라도 해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해결해야 할 현실만 보면 너무나 답답하다. 현실을 바라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 아니다. 현실 너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보다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의 차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믿음이야 어디 갔다가 왔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내주하심은 변함없지만 충만함은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17.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장래사를 선포하는 것(의미가 분명한 메시지)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인 방언’(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하셨을까?

    이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보여주어서 백성들이 순종하게 하려고: 예언을 행할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있음을 보여주셨을 뿐이다.

18. 장로로 지명된 자가 소집에 응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일에 오지 않았다? 이런 인간을 그냥 둬? 예전에는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벌을 줬다고 하던데?

    모세는 이들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더 주목했다: 자기의 기분이나 느낌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모든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좋겠다? 당연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목사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다고 열심히 가르치지 말라는 목사도 있던데? 어떤 분은 모든 교인들이 목사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기도 하고!

19. 그러면 진에서 예언하는 것을 금하라고 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잘못인가?

    모세를 수종드는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백성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기 전에 모세의 수종자이다. 모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수종자로서 모세의 권위를 세워야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말함으로서 오히려 모세의 권위를 제대로 세운 셈이다. 만약 모세가 화를 내고 그들을 벌하려고 했더라면 여호수아는 뭐라고 했을까? 말렸을까? 말려야 잘 하는 건데... 나발을 벌하려는 다윗을 말린 아비가일처럼(삼상 25장)!

20. 아마도 메추라기가 진의 바깥, 사방 30여 Km에 높이가 1m 정도로 쌓였던 모양이다. 31절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이틀 동안 거둬들이려고 뛰어다녔고, 십 호멜(=약 120말)을 거두었으니 하나님께서 엄청난(어쩌면 과도한) 양의 메추라기를 주셨음이 틀림없다. ‘어디 한번 실컷 먹어봐라’ 한다고 좋다고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어떡해? 고기가 지천으로 쌓였는데?

    회개가 우선이다: 하나님의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한 일에 대해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걱정말고 먹으라고 하실 것이다. 그런 마음도 없이 거둬들이느라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맛있다고 고기에 달려드니 작정하신대로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고기를 먹는 것보다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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