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0장


1. 예로부터 나팔 소리는 각종 신호로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몇 백만의 대군을 통솔하는 방법으로 나팔보다 더 나은 도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도구를 아무나 함부로 불면 안 된다. 그래서 제사장만 불게 했을까? 나팔수를 따로 두지 않고 바쁜 제사장이 나팔까지 불어야 하나? 출 19:16에서 답을 찾아보자.

    제사장이 부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나(9)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나팔 소리가 따르는 것도(마 24:31)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제사장이 부는 나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는 모습이 복된 것처럼(반대인 경우, 겔 33:4-5)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성도의 모습은 얼마나 복된가! 이제는 나팔 소리 대신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꿈에 계시를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2. 나팔 두 개로 몇 가지 신호가 가능한가?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몇 가지 신호를 구별해야 하는가?

    6가지(소집 때 2가지, 출발 때 2가지, 전쟁, 제사): 만약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혼란도 엄청나다. 하나님은 무조건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말은 과연 그러한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것이 신사적인 태도다(행 17:11). 설교는 무조건 ‘아멘’ 해야 하나? 그럴 수 있는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복이지만 설교자의 본의든 아니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요일 4:1).

3. 출발 신호인지 전쟁신호인지 어떻게 분간했을까? 울려 부는 것은 같은데?

    구름(불)기둥의 변화를 보고: 구름이 떠오르면 레위인들이 성막을 해체하고 백성들은 이동할 준비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나팔이 불면 이동을 시작했다. 만약 그 때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헷갈릴 수도 있었을까?

4.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나팔을 제대로 불어야 한다(고전 14:8). 상황에 맞지 않게 엉뚱한 방법으로 분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혼란이 일게 마련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헛소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도 없고 가르칠 사람도 없던 시절에 하나님은 자신을 이런 방법으로 나타내셨다. 그 하나님의 명령을 이런 식으로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이제는 더 나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정확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한다.

5. 나팔 부는 방법이 제사장이나 모세의 고안이었을까,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을까?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가르침이었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이 나팔을 부는 것은 모세의 고안인데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자들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런 면에서까지 자기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시다.

6.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것은 ‘대대에 영원한 율례’이다(8).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불지?

    제사장이 있어야 불지: 구약시대에 주어진 율법과 제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재해석되고 완성되었다(마 5:17).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제사장이 나팔을 불듯이 제사장이 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대대에 영원한 율례이다.

7. 하나님께서 나팔 소리를 듣고 구원하신다(9)? 나팔 소리를 듣고 너희를 기억한다(10)? 소리가 커야 한다는 뜻인가?

    하나님에게 나팔 소리가 크냐 적으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참고, 왕상 18:26-29, 36-38), 평소에는 잊고 계시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 기억하시는 분도 아니시다(시 121:4).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것을 가리켜 ‘나팔 소리를 듣고’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나팔 소리를 듣고 행동한다. 하나님은 그 순종을 보시는 것이다.

8. 모든 제사에 나팔을 분 것은 아니다. 어떤 제사를 드릴 때 나팔을 불지 않았는가?

    속죄와 관련된 제사들: 나팔 소리는 감사와 감격이 담긴 것이다. 속죄는 그렇게 얌전하게 받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도 마음이 무겁다. 그런 다음에 드리는 번제나 화목제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9. 시내산에 도착한지 11개월 5일(애굽을 떠난지 13개월 5일) 만에 드디어 출발이다. 그러면 성막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의 모습으로 증거막에서 머무른지는 며칠 째인가?

    50일 만이다: 증거막을 완성한 것은 1월 1이었다(출 40:17). 그 동안에 1, 2차 유월절을 지켰고(민 9:2), 인구조사(민 1:1)도 마친 다음 출발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바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0. 시내 광야에서 바로 바란 광야로 갔을까? ‘자기 길을 행하더니’ 이 표현이 왜 들어와 있지? 이 부분을 NIV는 traveled from place to place로 번역하였다.

    뒤에 나오겠지만 시내광야를 출발해서, 다베라(11:3), 기브롯핫다아와, 하세롯(33:16-17, 미리암의 문둥병으로 7일간 행진을 중지)을 거쳐서 바란광야에 도착했다.

11. 행진의 가장 선두에는 누가 섰는가?

    언약궤(33): 지뢰탐지기처럼 앞에서 길을 열었다. 그 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서있게 따라갔다. 구름이 멎은 곳에 언약궤가 서고 그러면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세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야 하는 성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걷을 수 있는 장막을 세우고, 가자면 어디로든 따라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불러도 버리고 가기에는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는 시멘트 건물을 세우지 말자(고후 5:1).

12. 세 지파가 출발하고 나자 성막을 걷었는가(13-17)?

    철수하는 순서가 아니라 행진하는 지파별 순서로 기술한 탓이다(2장 8번). 1진 다음에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매고, 2진 다음에 고핫인이 성물을 메고 행진했다.

13. 성막을 세우는 일은 누가 했는가? 고핫인은 아니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먼저 도착해서 성막을 세웠다.

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오합지졸의 모습일 수도 있고, 노예군단일 수도 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적도 없는 대규모 민병대라고 할까? 이제는 어떻게 변했는가?

    군대(28):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절도있고 씩씩한 군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불러준 모양이다. 여전히 야곱의 모습으로 살아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준 것처럼! 성도답지 못한 우리를 보고 성도라고 불러주시는 것처럼?

15. 모세가 호밥에게 한 말은 권유 같아 보인다(29). 두 번째 한 말은 사정쪼다(31-32). 호밥이 이것을 거절하면 결국은 무엇을 거절하는 셈인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룻이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모세가 말한 내용이 이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실상은 어마어마한 복이다. 우리도 멋모르고 이런 복을 받았다. 성도의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듣고 따르는 자는 횡재하는 것인데...

16. 호밥이 결국은 떠났다는 말인가, 동행했다는 말인가?

    다른 기록을 참고하면 결국은 동행했다(삿 1:16, 4:11-21, 삼상 15:6). 그래서 훗날 대적 시스라를 죽이는 큰 공적을 세우기도 한다.

17.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눈의 역할을 법궤가 하고 있는데 호밥에게 이렇게 요청해도 되나?

    하나님께서 머무를 곳을 지정하셔도 광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동역하시며,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전적으로 그 분을 의지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조화로움이 성도에게는 절실히 요구된다.

18. 광야의 땡볕?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럴 때에 구름 한 점이 얼마나 시원할까? 그런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덮어주는 구름이 있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일까? 그 구름 밑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우리는 어떨까?

    우리도 날마다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부모의 돌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듯이 우리도 날마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 채 엉뚱한 불만을 쏟아놓고 있는지 모른다. 날마다 감격함이 없는 성도는 광야의 땡볕을 가려주는 구름 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이다.

19. 이 땅에서 사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아니,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세의 기도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나아가야 할 때는 앞장서서 대적들을 쫓아내시고, 머무를 때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드린 모세의 이 짧은 기도는 그야말로 멋진 기도문이다.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적이 산재한 광야길이라도 담대하게 행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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