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9장


1. 현 시점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지 정확하게 일 년이 지났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유월절이 바로 애굽의 장자를 죽일 때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이 재앙으로 애굽에서 쫓겨나왔는데 바로 그 유월절의 1주기가 되었기 때문: 실제로 1월 15일에 애굽을 떠났다.

2.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중에서 광야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행위 하나는 무엇일까? 광야에서는 정식으로 지킬 수 없으니까 가나안 땅에 정착하거든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을 것이다(출 12:25).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 집이 있어야 바르지? 그렇다면 광야에서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유월절을 지켰을 것이다 피를 제단에 쏟거나 뿌리는 방식으로 하지 않았을까? 자기 장막 주변에 뿌리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 같다. 피를 함부로 뿌리지 않았으니까!

3. 시내산 출발, 증거막 완성, 인구조사, 두번째 유월절을 날자순으로 정돈해보자.

    증거막 완성(출 40:17, 2년 1월 1일), 유월절(민 9:2, 2년 1월 14일), 인구조사(민 1:1, 2년 2월 1일), 2차 유월절(2년 2월 14일), 시내산 출발(민 10:11, 2년 2월 20일).

4. 유월절 예물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운 일인가?

    아직은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살아있다는 뜻: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이때 까지는 출애굽의 감격이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어려운 고비를 넘긴 어느 분이 감사제목이 이랬다, ‘다시 십일조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워서 못 하는 분도 있지만 할 수 있음이 감사한 분도 있다. 하고 싶어 죽겠는데... 하는 사람도 있다.

5. 백성들이 지도자에게 질문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도자일까? 멋지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으니 ‘기다리라’고 한다(8): 지도자가 이런 식으로 물어보고 와서 대답해야한다면 권위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지도자라면 괜히 아는 척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하는 지도자가 가장 귀한 지도자다. 제발 다 아는 척 하지 말자.

6.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그 사람들에게만 한 달 미루어 주셨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도 매사에 예외가 없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우리의 형편을 감안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기회를 더 주었음에도 지키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징계하신다(13).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큰 소리를 치는 인간에게 끝까지 인내하시는 분은 아니다. 최후의 심판마저 없는 유약하신 분은 아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는 표현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형편을 고려하시는 증거다.

    이렇게 한 달 미루어진 유월절은 2월 14일부터 20일까지 지키고 그 날에 시내산을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였다면 이 정신은 오늘날 성만찬 예식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전 5:7, 마 26:27-28).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났음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7. 유월절의 자세한 규정은 출 12장에 있다. 다른 부분은 거기서 보기로 하고 한 가지만,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그러면 왜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꺾이지 않을 것에 대한 예언이다(요 19:36, 시 34:20).

8.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여겼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원하면 타국인이라고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았다(물론 이들은 할례를 받은 타국인이었다, 출 12:48). 예수를 믿는 모든 자(믿음으로 영적 할례를 받은 자)를 부르셨다. 어떤 차별도 없이 우리를 부르셨다.

9. 증거막을 덮은 구름이나 불 모양 같은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의 임재: 친히 나타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셨다. 구름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표를 내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를 내신다. 아무리 눈치를 줘도 알아채지 못하는 녀석은 어떻게 하나? 꼭 꿈에 장죽을 짚은 할아버지 폼으로 나타나야 되는가?

10. 이스라엘은 무엇을 따라서 광야를 다녔는가?

    하나님: 구름과 불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따라 광야에서 살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성적인 인간이기보다는 감성적인, 감정적인 인간이 그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상도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이런 이적적인 현상이 광야생활 내내 계속되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심각한 경고를 보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감격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조차 무감각하게 여겨질 수 있다니?

11. 이동하던 이스라엘은 어디에 진을 쳤는가?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고 대답해야겠지만 그냥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준비도 없이 따라나선 광야에서 무슨 낙이 있었을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낙? 하나님께서 이걸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로맨티스트다!

    우리 가곡 중에 ‘내가 빛이라면 햇빛, 달빛, 다 두고 그대 눈길 머무는 곳 초롱같은 별 되리라’ 이런 가사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가사라고 생각된다. 이런 연인들에게 ‘결혼은 현실이야, 한번 살아봐라’ 이렇게 초를 쳐야 할까? 하나님과 더불어 이런 심정으로 살 수 있는 걸까?

12. 구름이 증거막을 오래 덮고 있었으면, 한 몇 년 동안 그대로 있었다면 싫증이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때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데,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을 바에야 뭣하러 애굽에서 나왔나?’ 이런 불평이 없었을까? 왜 없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었을 것이다. 성도들에게 아마도 이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리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자. 할 일도 없고, 볼 것도 없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복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바울도 회심이후 아라바에서 삼년, 고향에서 십여년, 옥에서 이년을 무료하게(?) 지냈다. 그렇게 지내야할 때는 그렇게 지내야 한다.

13. 새로 진을 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구름이 떠오르면 어떡하지?

    또 가야지: 훈련하는 것 같다. 이유없이 걷으라고 하고, 걷으면 치라하고, 걷으라고 할 것 같아서 치지 않고 기다리면 걷으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따라)’ 라는 표현이나 유사한 표현이 계속 반복된다(18-23). 복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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