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6장


1. 남녀평등이란 참으로 이루기 어려운 이상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서로 우월한 위치에 서려고 싸우고 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실까?

    구별하지 않으신다(2): 남자와 여자는 기능상 차이가 분명히 있음에도(창 3:18) 인격적으로는 동일(창 3:24)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면 남자들이 여자를 차별한 경우가 많았다.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원, 즉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데에서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다.

2. 나실(나자르, 즉 구별이란 뜻)인이란 세상과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건데 그러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2가지)?

    포도(3-4)와 부모형제(7): 포도는 먹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부모형제는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존재이다.

3. 히브리인들에게 포도는 중요한 주식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포도를 먹지 말라는 것은 먹는 낙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낙으로 사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낙으로! 포도는 세속이 주는 즐거움의 상징이다. 기쁨과 풍요의 상징이다. 적어도 나실인은 이런 기쁨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더 커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일정한 기간을 스스로 정해서 하는 것이기에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도들의 삶도 기본 바탕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4. 나실인이 머리털을 자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특별한 권위 아래 있음에 대한 상징(7): 마치 대제사장이 관(출 29:6)을 쓰고 직분을 감당했던 것이나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이 권세 아래 있는 표시(고전 11:10)였던 것과 비슷한 셈이다. 삼손의 긴 머리는 힘의 원천이었지만 머리카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진짜 힘의 원천이었고 머리카락은 순종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5. 주검은 죄악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므로 시체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민 19:11, 14). 그러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인륜지대사다. 부모 형제자매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나실인이 지켜야하는 규례가 제사장보다 더 엄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원, 일정 기간만: 나실인의 서원은 자원한 것이며 일정한 기간(=잠간)동안만 지키는 것으므로 최소한 그 기간만이라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지내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 규례만을 두고 본다면 나실인은 대제사장이 된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겨야 했다. 왜냐하면 제사장도 부모형제의 장례에는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레 21:2-3).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부모의 장례에 참석이 불가능했으니까(레 21:10).

6.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도 누구 말마따나 인정머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분이 아니시다. 많은 예가 있지만 본문에서 하나 찾는다면?

    본의 아니게 실수하는 경우를 인정하심(9): 홀연히 그 곁에서 죽는다는 것은 갑자기 죽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체에 접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19:13)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7. 성도나 목사가 죄를 지어 신문이나 방송에 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본문의 어떤 표현이 이와 비슷한가?

    나실인이 시체에 접하게 되면 ‘머리를 더럽히게’ 된다(9): 머리털이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나실인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손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복도 머리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11).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당할 수도 있고, 회복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8. 누구든지 시체에 접촉하게 되면 7일간 부정하다(19:11). 그 7일이 지나야 속죄를 위시한 각종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실수한 나실인이 제 8일에 드리는 제사제물이 왜 이럴까? (별로 큰 죄가 아니라서? 제물의 크기는 죄의 크기와 상관이 있을까?)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는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이다(레 14:22): 그러니까 죄가 많고 적음에 따라 제물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제물이 크기가 달랐다. 나실인이 반드시 가난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실수한 나실인은 그렇게 가난한 자로 취급되었던 것 아닐까?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말이다.

9. 속죄제, 번제를 다 드렸는데 왜 또 속건제를 드리나(12)? 이중과세 아냐?

    새로운 시작(12절의 ‘무효’): 다시 나실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 드리지 않아도 되는 제사다. 이미 드린 속죄제와 번제는 과거에 속한 것이고 지금 드리는 속건제는 미래에 속한 것이다. 이미 용서받은 자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드리는 셈이다. 그래서 제물도 훨씬 크다.

10. 나실인이 서원을 마치는 과정이 더 복잡하다. 몇 종류의 제사를 드리는가?

    7종: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소제, 전제, 요제(흔듬), 거제(듬)로 모든 제사를 총망라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긴 일을 마치는데 무슨 제사를 이렇게 많이 드릴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지만 모든 제사는 기본적으로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다(레 7:12).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진정 감사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더 드리고 싶으면 더 드릴 수도 있다(21).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의무처럼 여겨지는 것은 일종의 경직화 현상으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현상이다.

11. 나실인이 드려야 하는 제사의 종류가 아주 많다. 제일 먼저 드리는 제사는 무엇일까?

    속죄제(11, 16): 범죄한 인생이 하나님에게 나오는 출발점이 회개임을 보여준다. 죄를 없애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14절은 예물에 관한 것이지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 머리털을 민다는 것은 해방을 뜻하는가? 그동안 먹지 못한 것도 먹을 수 있고?

    신분상의 변화는 없다: 나실인이든, 일반인으로 돌아오든 하나님의 백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혹시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았더라도 기간이 지나면 기꺼이 직분을 내려놓아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직분이나 일을 내려놓으면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여기는 철없는 어른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13.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그 귀한 머리털을 민 다음에 어떻게 버리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18): 제단의 불은 아무 것이나 태우는 불이 아니다.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이외의 용도로는 쓸 수 없는 귀하디 귀한 불이다.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14. 나실인이 드린 예물 중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다(20). 제사장이 수고했다고 드리는 것일까?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에게 드리는 본래 의도는 제사장의 생계를 위함이지만 여기서 특별히 따로 언급한 이유를 나실인의 구별된 삶을 마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생각해보자.

    바톤터치: 나실인이 임무를 마치고 일반인으로 복귀하더라도 그가 드린 헌신과 봉사가 제사장을 통해서 계속된다는 의미가 담긴 것 아닐까?

15.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제사장을 세우신 주된 이유가 제사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한 마디로 결론낸다면?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복일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종처럼, 노예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다.

16. 간단하게 ‘여호와는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러면 될텐데(24-26) 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할까? 복을 많이 받으라고?

    은연 중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세 번의 복도 현세적인(육체의) 복, 영적인(영혼의) 복,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최종적인 복이라고 생각해도 같은 내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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