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장


[1-18: 여호와의 징계]

1. 하나님께서 치신 것은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왜 ‘자기’가 고난을 당했다고 하는가(1-18)?

    민족의 고난이 곧 자기 개인의 고난과 동일하다: 민족의 아픔이 곧 자기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픔이 곧 민족의 아픔이기도 하다. 민족이 아픈데 나 혼자 즐거울 수 있는가? 교회가 아픈데 나 혼자 행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교회에 속한 성도가 아니다.

2.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멸망시킨 것은 바벨론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누가 그랬다고 하는가?

    여호와(1): 바벨론은 노하신 여호와의 매일뿐이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할 자는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성도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런 자에게는 회복의 희망이 있다.

3. 여호와 하나님의 매가 얼마나 아픈가? 1-18에서 한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각자 다를 수 있음)

    예컨대,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어두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12): 조준사격인 셈인데...?

4.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실 때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시 23)’라고 노래하지만 그 분이 심판하실 때에는 초장이 어떻게 변하는가(2)?

    흑암으로: 푸른 초장이 번영과 배부름을 의미한다면 흑암은 재난과 굶주림이다. 여기서 ‘이끌어’라는 말은 짐승을 몰고 갈 때 쓰는 말이지 사람을 인도할 때는 쓰이는 말이 아니다. 결국 ‘흑암으로 이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짐승처럼 몰고가서 도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5.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날마다 쓸 것, 마실 물을 주셨다. 은혜를 베풀실 때는 끊임없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분이 심판을 하시면 어떻게 되나?

    자주 자주 치신다: 한번 혼냈으면 됐지? 그러지 말라! 끝없이 은혜를 받아 놓고 화가 나면 한 번만(↔자주 자주) 야단치고 말라고? 은혜 베풀 때 정신차려야지!

6. 천이 낡아 찢어지듯이 살과 가죽이 낡아지면? 뼈가 꺾이면 어떻게 돼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표현: 살과 가죽이 없으면 뼈에 극심한 고통이 가해진다. 거기다가 부러지기까지 하면... 먹지 못하고 병이 들어 쇠약한데다 뼈까지 부러질 정도면 엄청난 고통을 겪겠지! 이런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먹을 것이라고는 ‘담즙’ 뿐이고 할 일이란 게 ‘수고’ 뿐이다(5). 그러면 죽은 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6).

7. 하나님의 매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7-17절을 보기와 같이 요약해보라.
[보기] (7)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감금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버림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방해(다듬은 돌로 쌓으면 허물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
    (10)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 노림
    (11)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 적막하게 하셨도다: 조력자 제거
    (12-13)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조준사격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창피
    (15)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고통(배고픈데 쓴 쑥으로 배를 채우면 어떻게 되나?)
    (16)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돌에 이빨이 찍히고 재를 뒤집어 씀(어떤 경우일까? 대적이 발로 짓밟는 바람에? 아니면 흙구덩에 떨어진 먹을 것을 입으로 물다가?)
    (17)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 버렸음이여: 마음의 고통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절망

8. 이런 하나님의 매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여호와께 대한 소망이 끊어짐(18):

[19-39: 은혜에 대한 소망과 위로]

9.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선지자는 어디서 희망을 발견하는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에서(22): 긍휼은 자비의 결과적 산물이다. 매맞은 흔적만 바라보고 있으면 낙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20)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날마다 여호와께서 자비하심으로, 성실하게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계신다(23)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복되다. 그렇게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10.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24)? ‘기업’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면?

    모든 것(He's everything to me = 어느 복음송 가사): 수학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말의 기업은 회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본래는 ‘분배되어야 할 몫’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면 모든 것이 내 것인 셈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기다리고(25) 바라야 할 것(24)은 하나님이시다.

11. 번역된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본문이 지닌 시적 미각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25-27 세 구절의 원문은 동일하게 ‘좋도다(=히, 토브)’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말로도 그렇게 시도해보자. <좋도다(좋으시도다), ...>와 같은 형태로 바꾸어 보자.

    (25절) 좋으시도다 여호와는!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26절) 좋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27절)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앞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선지자가 여기서는 이렇게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 시적인 표현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한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에서 이런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12. 성도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때가 있다(출 14:14, 히 12:9).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주님을 신뢰함으로(26, 28, 31-33): 불평, 원망, 좌절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음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다.

13. 왜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라고 하는가(29)?

    땅바닥같이 낮아져서 기다리라는 말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께서 야단을 치셔도, 혹 잘못 야단을 치셔도 일단은 참고 들어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멍에를 메게하셨다면 끝까지 참고 순종하는 자에게 좋은 결과를 주시지 않겠는가?

14. ‘때리거든 맞고, 욕을 하거든 들으라(30)!’고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누가 때리든, 누가 욕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도 아니시기 때문이다(33). 우리가 잘못하여 이런 고난이 왔을지라도 참고 견디면 반드시 풍부한 자비대로 갚아주실 것(32)이기 때문이다.

15.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본심과 다른 이런 어려움이 닥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34), 재판을 굽게 하는 것(35),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36)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이다, 39절). 이런 것들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해서 그렇지 어디 한 번 두 번 안들어야 말이지... 출애굽 때부터 바벨론에 깨끗이 망하기까지 한시도 하나님을 마음 편케하지 않았다. 여호수아 때만 잠시 빼고...

16. 화든, 복이든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룰 수 있겠느냐(37-38)?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나?

    원망없이 순종해야지(39, 롬 8:28, 벧전 2:19, 20)!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 이런 고난에 대한 예방책이기도 하고 치료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나의 기업이시다(24).

[40-51: 회개를 권고함]

17. 고통 가운데 울부짖던 자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면 필연적인 다음 순서는 무엇인가?

    회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집나간 탕자가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서 종이라도 좋으니 돌아가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결국은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18.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버리셨던 하나님(42-45): 기도를 듣지 않으실 뿐 아니라 쫓아와서 살육하시기도 하셨다. 그래도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잘못해서 그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치셨을지라도 그 분께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는 증거다.

19. 모든 대적이 우리를 비웃고(46) 온갖 고통으로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른다(48-49). 절망하고 쓰러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릴까(욥 2:9)? 선지자의 권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린다(50):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기다리라는 것이 본 장의 핵심 메시지이다.
    군축(窘逐): 뒤쫓다
    진개(塵芥): 쓰레기나 오물
    폐물(廢物): 경멸의 대상

20.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난 뒤에 선지자가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51)’ 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들이 당하는 치욕을 보는 고통 때문이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남자가 불쌍할까, 여자가 불쌍할까? 죽고 다치기야 남자들이 많이 죽고 다치겠지만 죽지는 않더라도 치욕을 당하기는 여자들이 더 심각하다.

[52-66: 구원 요청과 응답에 대한 확신]

21. 사냥꾼에게 쫓기는 새처럼 쫓기는 자, 대적자에게 사로잡혀 구덩이 던져진 자, 물이 머리 위로 넘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제 죽었구나(=멸절되었다, 54). 도무지 희망이 없을 정도로 대적에게 쫓기는 장면이다. 정상적이라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2.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55).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믿음 외에 진정으로 성도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성도가 절대로 낙망할 수 없는 이유이다.

23. 개역 성경의 표현이 옛날식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러 있는데 이 부분에는 특히 더 그렇다. 다음 구절의 밑줄친 부분을 좀 쉬운 표현으로 고쳐보자.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3자)셨고 내 생명을 속(1자, 2자)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3자)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9자)옵소서
(60)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11자)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61)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파(2자)하며 나를 모해하(9자)는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63)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2자)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65) 그 마음을 강퍅하(4자)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시며
(66) 진노로 저희를 군축하사(4자)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풀어주)셨고 내 생명을 (구, 구원)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돌아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옵소서
    (60)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원수 갚겠다고 덤비는 것과)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61)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파(모욕)하며 나를 모해하(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63)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비웃)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65) 그 마음을 강퍅하(고집스럽)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시며
    (66) 진노로 저희를 군축하사(쫓아가서)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24. 원수에게 이렇게 갚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어울이지 않는 일 아닌가?

    원수 갚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이런 희망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실 것이니 쓰러지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갚아주실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시지만 자신의 원수(사탄)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원수는 사실상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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