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0


1. 두 사사 돌라(잇사갈 지파)와 야일(므낫세 지파의 길르앗 가족)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전혀 없나보다(1-5). 사사의 행적이 기껏 아들 삼십에 관한 것 뿐이라? 어떤 시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사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별로 없는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다. 사사가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백성들이 평안했다는 말이다. 아비멜렉 때문에 몇 년간 고생하고 45년(23년 + 22년) 동안은 잘 지냈네!

2. 야일은 얼마나 대단한 부자였을까?

    아이들 30명이 각자 소유의 승용차(=어린 나귀)를 가진 셈이다: 하봇야일이란 명칭은 사사 야일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다(민 32:41, 신 3:14). 위대한 조상 야일이 차지한 것을 잘 관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 우상숭배를 병으로 치면 이전과 비교하여 6절에는 어떤 특징이 보이는가?

    병이 점점 더 깊어진다(‘다시’는 원어로 증가하다는 뜻): 이스라엘은 온갖 잡신을 다 끌어들였다(바알,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 암몬 자손의 신, 블레셋 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생각만 부정하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우상과 잡신들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온갖 잡신들과 우상이 들끓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

4. 이스라엘이 온갖 잡신이란 잡신은 다 섬겼네(6)?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나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 탓이다(롬 1:28):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성장하면 반드시 퇴보하는 걸까? 아무리 은혜를 부어줘도 결국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가? 아무리 선한 것을 입력해도 악한 것이 출력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가? 이런 결과를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신 31:16-21). 이런 짓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미리 말씀하셨다(신 28장, 레 26장).

5. 이전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들은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왕, 가나안 왕,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이었다(주로, 북, 혹은 동쪽). 이스라엘의 죄악이 점점 깊어지니 이제 새로운 민족이 등장한다. 블레셋은 이전의 민족들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남서쪽에서 침입함으로 그동안 고통을 덜 겪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마저 압제를 당한다. 이스라엘 전체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블레셋(팔레스타인)은 그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6.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표현은 무엇인가?

    6절의 ‘다시’: 이전에는 ‘또’ 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3:12, 4:1, 6:1). 제일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느낌이 드는 단어, ‘마침내’라고 하였다(3:5). 마침내, 또, 또, 또, 다시! 이렇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배반한 것이다.

7. 온갖 우상을 다 섬기면서 이방인의 압제 아래 살던 이스라엘이 잘한 일이 있다면?

    고통을 당하다가도 하나님을 생각해내는 것: 잘 먹고 잘 살 때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신 8:12-14, 31:20),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이런 일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잘 먹고 잘 살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일(신 11:13-16)은 불가능한 일일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8. 6-16절에 제목을 붙여보자. 이스라엘의 범죄? 이스라엘의 고난?

    하나님의 근심: 사사기의 주된 내용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이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민족에게 짓밟힌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못하시니 근심할 수밖에 없다. 짐짓 ‘모르겠다’고 하는 데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매달리니 하나님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이 부분의 회개가 사사시대 전체 중에서 가장 진지한 회개일 것이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사랑 때문에 또 고민을 하신다. 또 누구를 불러서 구원할까? 그러니 그 다음에 나오는 입다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근심이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행위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9. 이스라엘 백성들이 밥먹듯이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은 회개도 밥먹듯이 했다는 말이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의 회개가 가장 진지한 회개였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스스로 돌이킨 점(10): 비록 압제를 견디지 못해서 회개하긴 했지만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책망을 하지 않아도 돌이켰으니 스스로 돌이킨 것이라고 하자.
    회개하고 바로 실천한 점(16): 스스로 이방신들을 버렸다.
    하나님께서 모르겠다고 해도 끝까지 매달린 점: 하나님께서 친히 매를 들어도 매달리는 것이 잘 하는 일이다.

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민족들은 언제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는가?

    애굽 사람은 출애굽 때, 아모리 사람은 광야에서 행진하던 때, 나머지는 사사시대에 들어와서 알게 모르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이다(시돈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보아 아마 하솔 왕 야빈에게 협조하였을 것이며, 마온 사람들은 아마 아라비아 지역에 거하는 미디안족 일 것이다, 대하 26:7). 그렇게 구원을 베풀었지만 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렸으니 이제는 구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1.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시면 포기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한 번 안하겠다고 했으면 끝난 것 아닌가(13-14)? 계속 용서를 빌면 하나님도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가?

    그래도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하는 것은 웬지 불경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이 변함없이 살아 있으므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말씀보다는 그 이면의 속뜻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 공부할라카거든 학교 때려치아라’ 한다고 당장 학교 안 가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구원치 않겠다’는 말씀은 진짜 영영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식에게 매를 대는 아비의 가슴 아픔을 나타내는 말이다. 매를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매달리면 차마 더 이상 초달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겠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고 하시는 데도 한사코 매달리는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12. 다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느낌을 주는가?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14)

    삐친 척 하면서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난 모르겠다’ 혹은 ‘난 네 아버지가 아니다’ 하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이러실까?

13.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근심하시는가?

    징계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잘못했다고 하니, 혼을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시는 것이다. 못된 자식은 돌이켜도 근심거리다. 그러나 고민하신다는 자체가 아직은 이들을 완전히 버리시지 못한다는 증거다.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있다.

14. 도무지 본을 볼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내용을 기록한 이런 책이 어떻게 성경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은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라’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선택하신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실족하지 않게 돌보신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과 성령님의 돌보심에 의해서 이루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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