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3 |
하나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고 쫓아내야 할 대적을 남겨두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느냐고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가 잘못하고서도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느냐고 하나님을 탓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도 하다. 2. 가나안 족속들로 인하여 결국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빠지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신다(알고자 하신다)는 말이 옳은가?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아주 좁게 본다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나 안 섬기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가나안족을 그냥 두셨다고 하면 말이 된다.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라고 하셨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긴 새로운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많은 시련이나 시험(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들)도 따져보면 우리의 잘못을 선하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정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기도 하는가? 사람의 반응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사람을 만드실 때 그런 정도 자유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로봇이나 종으로 만들지 않고 대등한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종들은 잘 순종하는데 아들은 가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정리한다면: 3. 하나님께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시다니(2)? 하나님이 어디 육사 교관인가? 도대체 뭘 가르치시려는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 혹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님(삼상 14:6): 전쟁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시려는 것(=1, 4절의 ‘시험’),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웠더라면 굳이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꼭 이렇게 고생하고 전쟁을 치러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나? 4. 이스라엘이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더라도 열국을 그냥 쫓아내주시면 안될까?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격적인 대상으로(=자기 형상을 닮게 하심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끊임없는 징벌, 구원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결국 누가 이길까?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사랑이 더 크냐의 문제이다. 5. 그렇게 해서 남은 족속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블레셋은 삼손, 엘리, 사울 시대에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시돈 사람은 이세벨을 보내서 북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딸 아달랴까지 유다에 보내서 여호와 신앙을 초토화시켰다. 6. 하나님께서 그토록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틀림없이 그들과 뒤섞여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봐라 내가 뭐라드냐?’란 느낌을 주는 단어는? 마침내(5): 그토록 금하던 일인데(출 34:10-17, 신 7:1-5, 수 23:11-16)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어른들 말은 일단 듣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듣기 싫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많은 경험과 지혜가 쌓여서 생긴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보다 더 뛰어나다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다. 나중에 ‘기어코’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7. 이방인들과 혼인을 하면 필연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게 되는가?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게 되지는 않을까?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모든 것이 질적으로 떨어진다. 물리학의 표현에 따르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따른다. 스스로 고급화되기보다는 저급화되고, 세워지기보다는 부서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스스로 저급, 퇴폐, 저질, 부패되는 것이 인생이다. 가나안 족속들과 통혼하는 것은 필연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불신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려면 미리 그렇게 할 일이지 전도를 위하여 결혼하지 말라. 결혼 후의 전도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만큼 어렵기도 하지만 노력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말이다. 솔로몬도 이방여인들과 정략적인 결혼으로 이스라엘이 우상으로 물들게 했다. 8.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7절)’ 이것은 성경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 무슨 악을 행하였는가? 다른 악한 짓을 하고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이 아니고 두 표현이 같은 내용이다. 즉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악을 행하였다는 말이다. 그들이 행한 악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단다.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지역과 민족에 따라 여러 종류의 바알과 아세라가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바알브올 민 25:3, 바알갓 수 11:17, 12:7, 바알브릿 9:4, 바알세붑 왕하 1:2, 바알스본 출 14:2). 9. 가나안 족들이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메소포타미아 왕까지 동원하시는가? 그러면 다른 이방족들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을텐데? 메소포타미아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여기서는 팔레스틴의 북쪽 지역 일부를 통치하던 작은 왕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오론테스 강이 있는 하맛 지역). 별로 흔적도 없는 왕이니까! 10.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신이 이렇게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하였는가?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 특별하게 임하셨다(오순절 이후에는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여 내주하여 계신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자 즉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선택도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옷니엘은 그 전에 앞장 서서 기럇세벨에서 싸운 적이 있는 용사였다(1:13). 11. 8년의 압제 끝에 얻은 평화는 몇 년이나 가는가? 40년: 그보다 더 가야지! 다른 사사들의 경우에도 흔히 40년 동안 태평하였다. 사람의 기억력이 이게 한도인가보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고난을 당했던 아픔도 겨우 한 세대만 기억하고 잊어버리나보다. 12. 압제를 당한지 8년, 구원을 받은지 40년, 앞으로 이 수치는 어떻게 변해갈까?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압제를 당한 기간은 차츰 길어지고 구원을 받은 기간은 차츰 짧아진다: 구원을 받아도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만 가고, 13. 옷니엘이 죽으면 또 문제가 생기는가(11)? 대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장수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잘 먹고 잘 살 때 하나님을 잊지 않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신 8:12-18, 4:9): 다음 세대를 제대로 가르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끔은, 훗날의 얘기이긴 하지만 느헤미야나 에스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해야 했던 모양이다.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말씀으로 다음 세대를 길러야 한다. 또 다시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데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데 레위인들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을 텐데, 다들 어디 간 거야? 14.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이 하필이면 모압과 암몬, 아말렉에게 압제를 당하는가? 하필이면 점령당한 곳이 종려나무 성읍인가? 다음 사항을 참고해서 느낌을 말해보자. [모압과 암몬: 롯과 그의 딸들에게서 태어난 민족으로 몇 가지 잘못이 더 추가되어서(출11:17, 민23:11, 24:10, 25:1-3, 신23:3-6)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하도록 명하신 적이 있다. 아말렉: 에서의 후손이면서 출애굽시에 이스라엘을 대적한 최초의 민족이었으며 도말하여 천하에 그 이름이 없게 하리라(출17:14)고 하셨던 민족이다. 종려나무 성읍: 종려나무의 산지인 여리고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최초의 승리를 그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던 곳이다.] 15. 에글론이 강성케 된 이유는 무엇인가(12)?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 우리 주변에는 괴로움, 고통, 질병, 사고의 씨앗이 숨어있다. 우리가 범죄하면 이것들이 싹을 틔운다. 우리 몸에도 온갖 균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다. 건강하면 괜찮지만 몸이 약해지면 이것들이 득세해서 병들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가꾸는 것이 온갖 불행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비결이다. 16. 종려나무 성읍을 뺏겼는데 왜 18년이나 에글론을 섬겼을까?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중심으로 하는 요단강 서편 지역이 압제를 당했다는 뜻이다. 에훗이 에글론을 암살하고 즉시 에브라임 지파를 불러 모아 모압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에글론이 있던 곳이 에브라임 지파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주하려면 요단강을 건너서 모압으로 가야 했던 것도 그렇다. 17. 첫 사사 옷니엘은 유다 지파이었는데 두 번 째 사사 에훗은 베냐민 지파다. 왜 베냐민 지파에서 사사가 나왔을까? 모압 왕에게 압제를 받던 지역이 대체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에 대항했던 첫 사사 옷니엘이 가장 남쪽에 있던 유다 지파 소속이란 것은 그 때에는 전체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했다는 말이다. 18.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사들도 적과 싸우는 모습이 각각 다르다. 옷니엘이 용감하게 싸우는 ‘용사’라면 에훗에게는 어떤 명칭이 어울릴까? 자객(암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실 때 그 사람의 특징이나 장단점을 활용하셔서 쓰신다. 오경을 기록해야 할 모세를 궁중에서 교육받게 하신 것이나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다는 글을 남겨야 할 솔로몬에게는 세상 부귀를 다 누리게 하셨다. 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은 이방 문화에 익숙한 사울을 불러 쓰셨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불러 쓰실 때 적절하게 쓰임을 받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삶이 필요하다. 19. 원래 로마 군인들이 쓰던 칼은 한 쪽으로만 날이 선 칼이었다. 대적과 싸우다가 보고 배운 것이 양쪽에 날선 칼이다. 그 후 로마 군대의 기본 장비가 되었단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에훗이 거의 1000년 전에 그런 칼을 만들어(13) 쓴 셈인데? 에훗이 만만찮은 솜씨를 지닌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칼로 찌른다고 칼자루까지 따라 들어가려면(22) 힘도 상당할 뿐 아니라 평소에 칼 쓰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무튼 그 일에 적합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20.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암살을? 정정당당하게 싸워야하는 것 아닌가? 그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라면 에훗의 행위가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살이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정당하게 싸워야 할 대적을 상대로는 하나의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적이 무엇이냐는 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아이 성을 칠 때, 매복, 기만 작전을 썼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1.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고 오래 기다리다니(24)? ‘발을 가리운다’는 것이 여기서는 무슨 뜻일까? 잔다: 생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때로는 ‘용변을 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삼상 24:3). 22. 직접 싸움에 나설 수도 없는 비둔한 왕이 죽었다고 이렇게 힘을 못 쓰나? 이스라엘 자손이 모여서 쳐들어오기까지는 싸움을 대비할 시간이 있을 텐데? 비둔해서 싸움에 직접 나가지는 못해도 왕이 있고 없음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인가보다. 특히 전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23. 모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분이 좋다.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괄세하던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조공까지 받아가니까. 그래도 난 모압의 입장이 되고 싶지 않다. 왜? 매 맞는 이스라엘이 아들의 자격을 회복하는 날이 바로 모압의 제삿날이다. 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 아들이 낫기 때문이다. 24. 삼갈이 사사가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한 일이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아버지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그가 행한 일도 그렇다. 출신(아낫의 아들)과 무기(소 모는 막대기)가 도무지 사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낫(Anath)은 이방 여신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다. 어느 지파 소속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것도 아마 이방인 출신이기 때문 아닐까? 마치 법명을 가진 목사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또, 소모는 막대기는 무기로 적합하지가 않다(참고, 삼손의 나귀 턱뼈, 다윗의 물매돌). 그래서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은 아주 우스운 말이다. 어울리지 않는 출신과 무기로 대적과 싸워 민족을 구원한 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미련한 사람을 들어서 쓰신다(고전 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