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장


1. 욥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의로우심(2), 지혜, 강함(4), 만물의 주관자(5-10), 불가해한 자(11): 이것이 욥이 절망하는 이유다. 이렇게 능력있는 분이 나를 누르시니 나의 의로움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어디에 항변을 해볼 도리가 없다. 오직 그 분의 은혜만 기다릴 뿐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욥이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다만 그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당한 그 아픔 이상의 아픔을 겪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2. 친구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이다(예, 8:20-22). 이에 대한 욥의 대답은?

    나도 안다(2):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시고, 악인은 심판하신다는 정도는 누구라도 아는 상식에 해당하는 얘기다. 권선징악 아닌가!

3. 욥은 스스로 의롭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2절과 15, 20, 21, 23절을 비교해보라.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욥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15, 20, 21) 하나님과 자신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미가 표범에게 한번 뛰어보자고 말하고 싶지만 말이 되지를 않으니... 이것이 욥의 답답함이다. 소위 ‘불능범’이란 게 있단다. 개미가 아무리 표범에게 죽이겠다고 떠들어대도 죄가 되지 않는단다. 자력구원은 불가능하니 오직 은혜를 바랄 수밖에!

4. 욥의 생각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는 이유’가 친구들의 생각(4:21, 19-20, 5:6-7)과 어떻게 다른가?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3-4, 11-14) 때문이라고 말하는 데에 반하여 친구들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그 답을 찾았다. 이것은 큰 차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간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은 마치 표범이 개미보다 빠르다고 감탄하는 격이다. 절대적 위대함이 아니란 뜻이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대하신 분으로 알았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그를 비신앙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지켜주었다.

5.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수치로 나타낸다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래도 ‘천 마디에 한 마디’라면(3) 비교 대상이 될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비교해보자.

    1000 대 1이라면 거리로 환산하면 1000cm 대 1cm 즉 10m 대 1cm이다. 비유컨데 대충 개미와 표범의 속도라고 본다면 도저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라는 말이다. 개미를 천마리, 아니 만 마리를 모아도 속도에 관한한 표범 한 마리를 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도 인간과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양적인 차이라고 여긴다. 일종의 슈퍼맨처럼 여긴다. 동질인데 능력만 다르다는 뜻이다. 질적인 차이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다. 별로 좋은 예는 아니지만 은메달 수 백개가 금메달 하나를 못 이긴다. 결과적으로 온전한 자나 악한 자가 일반이다. 표범 앞에 빠른 개미나 느린 개미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6. 5-10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을 찬송하자는 말인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찬송이 아니다. 이런 분이시니 내가 어찌하겠느냐는 탄식이다.

7. 죄 없이 이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에 하소연을 하면 되는가? 이에 대한 욥의 생각은(11)?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 분은 ‘헤아릴 수도 없고’(10) ‘찾을 수도 없다’(11). 임금님이 내린 명령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을 하소연할 곳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욥의 절망이 이런 것이다. 그렇다고 임금님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8. 하나님은 기이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은 분명히 아는데 무엇이 문제인가(11-16)?

    만나야 물어보던지 따지든지 하겠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으니... : 훗날 욥은 하나님을 만나서 대면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욥의 고민은 올바른 고민이었다. 13절의 ‘라합’은 바다 괴물을 가리키는 말로(사 51:9)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9. 비록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간구함(15)

10. 욥의 마음은 하나님을 상대로 재판이라도 받아보고 싶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19)?

    누가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불러내겠느냐? 불러서 심문이라도 할 수 있어야 따져라도 볼텐데... 휴, 답답(24, 32)!

11. 욥이 불러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해도 자기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믿지 않겠다(16)? 삐친 건가?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자기가 불러놓고도 하나님의 대답이 자기가 불렀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알기 때문 아닐까? 공부를 잘 했다고 좋은 선물을 사주셨다고 하지만 ‘공부를 못했더라도 사 주셨을 걸’이라고 생각하는 조숙한 아이처럼!

12. 자신은 의롭고, 순전하지만(20, 21) 하나님 앞에 서면 스스로 죄인이 되고 만다(20).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절대자 앞에 서면 이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정말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박사님 앞에 선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이는 아이로서 잘 하고 있지만 아이이기 때문에 박사님 앞에서 빛을 잃고 있을 뿐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 강아지가 아니라 범을 무서워하는 큰 강아지다. 선하다는 것도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22, 일이 다 일반이라 = 그게 그거지)!

13. 욥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다른 친구들이나 오늘날 현대인에 비해서도 수준이 퍽 높은 편이긴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으면 굴절되기 마련이다. 22-24에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하나님은 순전한 자나 무죄한 자도 돌보시지 않는다: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23). 순전한 자나 악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마찬가지 아니냐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만 은근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현상적으로 그렇게 생각할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비록 자신에게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는 것도 일시적이며 제한적일 뿐이다(1:12, 2:6).

14.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세월이 빠를까(25-31)?

    가장 빠른 것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핵심은 ‘허무함’이다: 복을 볼 수도 없고(25), 이런 저런 노력도 소용이 없다(27-28, 29-31). 하나님께서 죄인이라고 하시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29)? 깨끗하게 씻어도 하나님께서 개천(웅덩이, 시궁창, 함정)에 빠뜨리시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15.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욥은(32) 그래도 가느다란 희망을 내비친다. 누가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지금은 없지만 말이다.

    중재자: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란 중재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함을 욥은 느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자기에게는 그런 중보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6.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베푸시고, 악한 자를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면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4:8-9, 8:5-7).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한번 맞장을 떠 볼 수도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 친구와 생각이 다른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만큼 온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최선을 다 하여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만큼 더 가까이에 계신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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