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장


1. 인생이 마치 전쟁의 날이나 품군의 날과 같단다(1). 이 둘이 어떻게 같은 것인지 본문의 다른 표현을 이용해서 설명해보자.

    곤고하고 수고로운(3) 날들의 연속: 인생은 고해와 같다거나 나그네 길이라고 하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친구들의 향해서 대답하던 욥이 일반적인 인생의 아픔을 잠시 언급하는 듯 하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이런 것 아니냐는 자조적인 발언이다. 고대에는 십수년 동안, 혹은 젊은 시절을 통채로 군에서 보내야 했단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겨우 2년 남짓한 군대에서 사병들이 기다리는 제대는 어떤 의미일까?

2. 종이 저물기를 기다리는 것과 품군이 삯을 바라는 것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일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림: 죽기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3. 수고로운 밤이 작정되었다고? 밤에만 고통이 찾아왔을까?

    환자들에게는 밤이 더 고통스럽다. 낮에는 그래도 관심이 분산되어 덜 하지만 천지가 고요할 때면 아픔은 더 크게 느껴진다. 정신적인 고통도 잠 못 이루는 밤에 더 심해진다. 휴식과 평안의 시간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의 시간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정말 괴롭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4, My fill of tossing). 피부에 조그마한 종기가 한 두 군데 생겼다가 터지는 것도 보통 짜증스런 일이 아닌데 전신이 몇 달 째 그 모양이라면(5)?

4. 욥의 날이 베틀의 북 같이 빠르단다. 전쟁의 날이나 품군의 날과는 어떤 점이 닮았을까?

    허무함(16): 빠른 것이나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나 다 허무한 짓이라는 뜻이다. 6절의 ‘소망 없이’, 7절의 ‘한 호흡’도 같은 의미이다.

5. 욥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찾지 못한다(8)? 하나님의 눈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망발 아닌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말 아닌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는 영적으로도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더구나 이것이 욥의 완전한 고백이 아니다. 19:27절을 보자.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신실한 성도가 말년에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은 심각하게 들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6.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음부로 내려가는 것의 공통점은(9)?

    회복불가(9-10): 다음 질문에서 계속.

7. 욥이 말하는 사후세계와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후세계의 차이점이 있다면?

    사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교통: 욥은 전혀 교통이 불가능하다(눅 16:26)고 생각하는데 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점과 다르다. 저승에서 사자가 올라오기도 하고, 죽은 조상들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생각과 전혀 다르다.

8. 아무리 괴롭다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함부로 입을 놀려도 괜찮을까(11-12)?

    그래야 한다: 진정을 괴롭다면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믿는다면 진정으로 매달리고 원망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엘리야도 그랬다(왕상 19:4). 억지로 참는 것은 가식이나 외식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 진심을 드려야한다.

9. 주께서 왜 바다나 용을 지키실까? 바다와 용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욥의 의도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왜 이렇게 지키고 계십니까?’라는 말 같은데?)

    함부로 날뛰는 위험한 존재: 바다가 흉용하면 위험하다. 여기서 바다라고 번역한 말은 큰 강을 가리키기도 한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흐르다가도 홍수가 나면 그야말로 위험 천만한 존재이므로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용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마찬가지다. 큰 뱀, 악어, 용 등으로 번역되는 바다 괴물이다. 욥은 자기는 절대로 그런 존재가 아닌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피고 계십니까?’ 라고 말한다. = 하나님을 향한 첫번째 질문.

10. 아무리 원망해봐야 소용이 없다. 잠이나 자자 하고 누웠더니 그래도 안 되더라. 왜?

    꿈 속까지 따라오셔서 나를 놀래키시니(14): 일을 열심히 하고 피곤해서 누우면 세상 모르게 자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누워서 딩굴어도 잠들 수 없고, 잠이 들어보았자 온갖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11.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은 뼈만 앙상한 몰골로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제발 좀 놔 주세요!’라고 비명을 지른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그랬을까! 욥의 이런 모습에서도 희망이 있는가?

    하나님의 손을 부정하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 아무리 큰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다. 욥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떠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18절의 ‘아침마다, 분초마다’, 19절의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심, 침 삼킬 동안’ 이런 표현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12. 복음송으로 잘 알려진 가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는 시 8:4절이다. 원래 욥이 부른 노래이었을까?

    아니다. 의미는 전혀 다르다: 시편은 감사찬송이지만 욥: 17-18절은 왜 이렇게 고통을 주시느냐는 원망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관심이 감격이지만 욥에게 하나님의 관심은 엄청난 고통이다.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십니까? = 하나님을 향한 두번째 질문.

13.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돌아다녀도 죄가 안되는 수도 있단다. 소위 ‘불능범’이란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로, 즉 헛소리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범죄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는 욥이 말(20)이 맞지 않는가?

    아니다. 영향이 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엄청난 애정을 쏟은 인간이기에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다. 참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 것이다. 욥이 하도 고통스러워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지 욥이 범죄한다면 하나님께 해가 된다.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억지다. 능력만 따진다면 하나님께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니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 하나님을 향한 세번째 질문.

14. 욥은 스스로 이런 벌을 받을만한 죄가 없다고 하더니(6:24-30) 여기서는 허물을 사하여 달라고 하네?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현재의 이 고통이 자신이 저지른 어떤 특별한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의 고통이 자신의 범죄함 때문이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그 이전의 복을 누리던 때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벌을 받을만한 죄가 없다고 말했지만 고통 가운데서 심한 말을 하기도 했고, 또 인간은 기본적으로 원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허물과 죄악을 사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하는 말(대체로 상대적인 말)과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절대적인 말)이 다를 수 있다.

15.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찾아도 찾지 못하실 거라고(21)?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느낌일까?

    아주 귀여웠을 것: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삐친 아이들이 하는 말 정도 아닐까? 내가 못 찾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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