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


1. 처음으로 보초를 서려고 나간 날이었다. 1시간 30분이면 교대해준다고 했다.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몰랐지만 줄잡아 세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교대를 해주지 않았다. 별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졸병이라고 말뚝 보초를 세우는 건가? 욕이 나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명이 건너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참이 와서 교대를 해주었다. 내무반에 와서 보니 1시간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즉시 집으로 연락해서 시계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욥이 견디기 어려운 점은 어떤 점인가?

    고통의 크기나 끝을 알 수 없는 점: 고통도 크기나 기간을 미리 알면 견디기 쉽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매달려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줄을 놓았더니 바로 10cm 아래가 바닥이더란다. 알았더라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일인데... 욥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좀 그랬다고 그렇게 핀잔이냐?(↔5:2)

2. 왜 하필이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워?

    본래 모래는 많음을 상징하는 표현인데 가끔은 무거움의 상징으로도 쓰였단다(잠 27:3).

3. 욥은 스스로 경솔했단다(3). 그래서 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달라지지 않는다(8-9 = 3:11-12): 달라지지 않는 것은 친구의 책망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비꼬는 표현 아닐까? 그래 니 잘 났다?

4.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독화살을 쏘아댄다. 몸에 박힌 화살의 독이 영혼까지 집어 삼킨다.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온다(4).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죽고 싶다(8-9):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릴만큼 대단한 욥도 결국은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인간미가 없는 거룩한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죽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전혀 원망이 없다(10). 다만 이유를 모를 뿐이다.

5.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욥이 또 무엇을 잃을 게 있다고 두려움에 떠는가(4)? 단순히 육체의 고통 때문일까?

    재산과 자녀를 잃을 때도 담담했던 욥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제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 자신을 징계의 대상을 삼고 계신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재산은 다 없어져도 하나님을 잃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셈이다. 겟세마네 동산에 피땀 흘려가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6. 들 나귀가 운다면 풀이 없는 것이고, 소가 운다면 꼴이 없는 것이다(5).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러는 줄 아느냐? 하나님의 화살이 그럴 수밖에 없을만큼 아프다. 이런 나를 미련하다고(5:2)?

7. 느닷없이 맛없는 음식 얘기를 왜 할까(6-7)? 문맥을 보면 아무래도 비유같은데...

    엘리바스의 충고를 가리키는 말: 4-5절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라면 이어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반박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다음 다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는 말 ‘죽고 싶다’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밥 맛이 없어서 죽겠다는 뜻은 아니다.

8. 욥의 한탄을 듣고 있던 친구들이 ‘옳거니’하고 꼬리를 잡았다면?

    10절의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이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9:2). 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한 것과 같은 믿음이라고 본다. 자만심이 아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건방지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엘리바스의 주장(4:7)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29절에도 반복된다!

9. 내가 돌이냐, 놋쇠냐? 그러면 뭔데?

    낸들 별 수 없는 인간 아니냐? 힘도 없고 소망((=나의 마지막)도 없다. 나를 도와줄 자도 없고 지혜도 없다(13)! 그런데 친구라는 자식들이...

10. 어려움에 빠져 신앙마저 버린 자에게 우선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14)? 신앙부터 회복하라?

    같이 아파해주는 것이 오히려 낫다. 괜히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지 말라. 갈 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1. 친구들의 변덕이 시냇물을 닮았다고? 시냇물이 어떻길래?

    쉽게 말랐다가 쉽게 넘쳐 흐른다: 비가 오면 넘쳐 흐르다가도 비가 그치면 즉시 말라버리는 팔레스틴의 시내를 말하는 것이다. 사시사철 흐르는 우리나라의 강물과는 달리 팔레스틴의 강물은 변덕스럽다.

12. 15-20은 시냇물의 변덕을 말하는 내용이다. 그러면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라는 표현은 물이 말랐다는 말인가, 물이 넘친다는 말인가?

    눈이 시냇물 속에 감취었다니까 눈이 녹아서 시냇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눈이 녹아서 넘쳐 흐르는 시냇물을 가리킨다. 얼음이 녹는 것과는 같은 의미의 반복이고(검어진다 = 흙탕물을 의미함) 17절과는 대조를 이룬다. 욥의 친구들이 그렇더라는 말이다. 욥의 친구만 그럴까?

13. 떼를 지은 객들(=대상들)이 왜 시냇가로 다니다가(=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을까?

    물을 찾으려고 길에서 벗어나 헤매다가 결국은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는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그런 행위가 부끄럽고 낙심스럽다(20). ‘데마의 떼들’이나 ‘스바의 행인들’도 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14. 허망한 자(21 =아무 것도 아닌 자)란 쉬 마르는 개울과 같은 자를 의미한다. 그런 자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겁이 많다: 겁이 많으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다. 욥을 위로하려고 왔지만 욥의 고난이 상상 외로 극심한 것을 보고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라면 여차하면 자신들도 그런 꼴이 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15. 드디어 욥이 친구들을 향해서 포문을 열었다. 22-30절을 요약하면 ‘내가 이런 것들을 친구라고...’ 정도가 될 것이다. 부분적으로 다음 절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22-24: 내가 잘못한 게 뭐고?
    25-26: 죽을 놈이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26b, ↔ 대부분의 영역본은 ‘절망한 자의 말을 바람처럼 취급하려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꼬리를 잡으려고 하느냐?
    27: 친구를 팔아 먹을 놈! 고아(←아버지가 없는 자)를 제비뽑아 팔아먹을 놈들!
    28: 나를 쳐다 보라. 똑바로 쳐다보면서 거짓말 하겠냐?
    29-30: 너희가 반성해라, 내가 언제 불의한 말을 했으며 선악을 분별하지 못 하더냐?
    엘리바스의 은근한 질책에 욥이 속이 좀 상했음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조금 과한 것 같다.

16. 25절의 ‘유력한지’(powerful)는 ‘고통스럽다’(painful)는 뜻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어느 쪽이 옳을지 생각해보자.

    전자로 해석하면 ‘진심으로 하는 말은 힘이 있다’는 뜻이 되고 후자로 해석하면 ‘맞는 말이 사람을 잡는다’는 식이다. 어느 쪽이든 약간 비난투의 말이 된다. 양쪽 다 가능해 보인다.

17. 욥이 친구들에게 돌이키라는 말은 무엇을 돌이키라는 말일까?

    욥을 정죄하는 태도: 아무리 고난이 극심하다고 해도 내가 그 정도의 선악도 분간하지 못할 사람이냐?(30)

    자신의 결백을 주장함(1-13),
    친구들을 질책함(14-30 - 7:6)
    엘리바스의 은근한 충고 4:7-9, 5:1 이에 대한 욥의 반발은?
    친구들에게(6장), 청중들에게(7a), 하나님에게(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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