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1. 2절의 ‘누가’는 실제로 누구를 의미하는가?

    자기(데만 사람 엘리바스): 첫타자 엘리바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듣기가 싫겠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느냐?’ 라는 말이다. 조금 거북하겠지만 그래도 마땅히 해야 할 말이니 참고 들어달라는 정중한 서두이다.

2. 불우한 이웃을 잘 돕던 사람이 갑자기 불우하게 되었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엘리바스의 방식과 비교해보자.

    이전에 네가 하던 말들을 생각해보라(우리도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자기가 그런 입장이 되었다고 답답해 하고 놀라면 안 되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던 대로 네 자신이 이제 실천해보라는 뜻 같다.

3. 엘리바스의 첫번째 충고(6-8)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믿음이고, 온전하게 행동해야 소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충고다. 바탕에 깔린 사상은 무엇인가?

    인과응보, 혹은 권선징악: 심는대로 거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지만(갈 6:7, 시 37:25-26) 하나님은 때로는 자연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라(창 21:2-23)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일반계시가 있고 특별계시가 있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4.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9-11)?

    예외 없음(9절의 ‘다’): 사자의 종류는 다 나온 것 같다(사나운 사자, 젊은 사자, 늙은 사자, 암사자의 새끼). 심판의 능력보다는 남녀노소 모든 악한 자에게 예외가 없음을 말한다.

5. 엘리바스가 체험한 신비한 경험(4:12-21)에 문제가 있는가?

    신비한 체험이 다른 성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라면 무익하다.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정죄하기 위한 말의 정당한 근거를 대기 위해서 자신의 체험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6.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이 말이 옳은가? 옳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지극히 당연하다: 욥도 아는 사실이다(9:2). 문제는 엘리바스의 이 말이 욥의 고난을 설명하는 말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욥의 고민은 ‘그런데 왜 유독 나에게만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라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선하게 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예 선하게 살려는 노력조차 필요없다. 충성하는 성도에게 이런 말을 해서 기를 꺾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명제도 어떤 경우에 써야 할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모든 사람에게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성도를 항상 출발점에 끌어다 놓는 우를 범하기 쉽다.

7. 예전 우스개에 티코 운전자는 껌과 장갑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나? 껌은 주차시킬 때 필요하고 장갑은 회전할 때 필요하단다(마치 쇼트트랙 경기처럼). 작은 차라고 이렇게 놀렸는데 하나님과 비교하면 인생은 어떤 존재인가?

    의롭지 않다(17)
    우매하다(18)
    연약하다(19): 티끌 위에 흙으로 집을 지어살다가 하루살이에게 눌려 죽을 인생이다. 인생의 연약함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유한하다(20):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 판에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줄을 뽑으면 한 순간에 쓰러지는 장막 같다.

8. 엘리바스의 주장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적용에 문제가 있다: 일반론으로는 당연히 옳은 말이다. 욥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인삼이 좋은 음식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논에 핀 장미는 잡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경우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냉정한 권면보다는 뜨거운 사랑을 우선해야 한다(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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