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 장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셨다.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2. 주께 묻겠다던 욥(4)이 무슨 질문을 하였는가?

    질문할 것이 있어서 묻겠다는 말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새로운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다.

3.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귀로 듣는 것은 간접으로 아는 것이다. 종교적 전통이나 조상들의 가르침을 배워서 하나님을 아는 정도였다. 반면에 눈으로 보는 것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인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의 차이라고 할까? 들어서 아는 수박의 맛과 한입 베어문 수박의 맛이 다른 만큼 다르지 않을까? 百聞이 不如一見이라?

4. 욥이나 친구들이 수없이 반복했던 인과응보, 상선벌악, 엘리후가 말했던 교육적인 목적의 고난 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는가?

    대답 없음: 오로지 하나님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을 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모든 이론이 무슨 소용인가? 지극히 하나님다운 답변인 셈이다.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알고 싶은 아들이 있다고 치자. 아버지가 계획을 낱낱이 설명해야 되겠는가? 그래야 아들이 마음놓고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가?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대답하는 것이 옳다, ‘걱정말고 공부나 해라.’ 신뢰의 문제다.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아버지 마음대로다.

5. 욥의 고난은 사탄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1:9).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사단의 이 질문에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는 셈인가?

    욥을 보라, 결국은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주지 않는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 감복할 수 있는 신앙이 가능함을 보여주셨다.

6. 하나님께서 욥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신다면 욥이 회개할 것은 없는데?

    욥의 회개는 이전에 말을 잘못한 것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이전에 피상적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개인 셈이다.

7. 하나님께서 욥을 정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욥의 탄식이나 하나님을 향한 항의나 원망도 옳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의로운 욥에게 고난을 허용할 자유가 있으시다. 그러면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유도 인정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자녀가 할만한 불평을 하는 것을 인정하시는 셈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대적하려는 원망이 아니라면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앞에 솔직한 것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자유하심과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8.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이 번제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셨는가?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 제물도 아니요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도 아니다. 욥을 받으셨다. 우리가 죽자고 헌신하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 덕에 우리의 수고와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제물이 된다.

9. 한 때 욥은 자신에게 중보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9:32-33, 33:23-24). 그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갚으시는가?

    욥을 중보자로 세우셨다: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욥이 친구들의 중보자가 된 것이다. 중보자를 기다리던 그를 중보자로 세우신 것도 기이하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자를 기다리던 소년이 자기 자신이 바로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감격보다 더한 감격이다.

10. 욥이 고난을 통과한 후에 받은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욥의 재산을 갑절로 늘여주시려고 이 고생을 시키셨을까?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것(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음): 재물의 복을 이미 누리고 있던 욥에게 또 다른 복을 주시려고 하셨다. 재산이 배로 는 것은 그냥 보너스일 뿐이다.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신 반면에 자신은 무지한 자이다. 안다고 열심히 떠들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떠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이 진정한 복이다.

11. 욥이 받은 재물의 복은 글자 그대로 갑절이 늘었다. 그런데 왜 자식은 갑절이 아닌가?

    이미 죽은 자식도 자식의 수에 포함된다. 죽었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가 있는 자식이기 때문이다(삼하 12:23).

12. 욥을 버렸던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했다(11). 언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신 후에: 욥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자들이 다시 회복이 되니까 찾아와서 위로(?) 했단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없는 때인데? 사람이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받은 욥은 주변 사람들의 이런 위선에 가까운 위로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위선적이기도 해야하고 알면서도 위선을 받아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보다.

13. 아들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데 여자들의 이름만 나타나는가?

    아들들의 특출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만큼 특출한 딸을 선물로 주셨다는 의미 아닐까? 딸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데 욥이 딸들에게 산업을 주었다는 것도 특별한 대우를 할만한 딸들이었다는 뜻 아닐까?

14. 손자 사대를 보기까지 140년을 더 살았다면 욥의 수명은 대략 얼마라고 추정할 수 있을까?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손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70세 정도로 추정한다면 210세 전후 아닐까? 이 정도의 나이라면 대략 아브라함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해당한다(데라는 205세, 창 11:32, 아브라함 175세, 창 25:7).

15.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도 욥의 아내를 손대지 않은 이유를 욥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아내를 배로 얻게되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기에: 송길원 목사의 글에는 아내가 둘이면 하나님도 감당 못한단다!

16. 욥기의 결론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잘못없이 맞을 수 있나?

    있다: 때릴 때 때리더라도 형편 봐가면서 때리는 것이다.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만 확신하면 왜 그러시는지 몰라도 된다. 문제는 신뢰다.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죄없이 맞은 사람이 누구인가? 예수님 아닌가! 하물며 우리가 ‘이럴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럴 수 있으시다. 틀(인과응보, 공의)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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