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 장(38:1-38) |
폭풍은 일종의 길나장이다: 원님이 행차를 해도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나장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혼자서 조용하게 나타나시면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꼭 이런 기상현상이 있었다(삿 5:4-5, 시 18:8-16, 왕상 19:11-13).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셈이다. 더구나 공적인 말씀을 하실 때는 더욱 그러했다(출 19:9-20). 2. 욥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인가?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는가? 인생이 아무리 완벽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지한 자일 뿐이다.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다가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때로는 물러서야 한다. 내 말이 아무리 옳아도!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능력을 믿는다면 말이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믿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 결국은 무지한 소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행위가 그렇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에게 그 행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3. 허리는 왜 묶는가? 한 판 붙자는 뜻이다. 지금까지 욥의 태도가 그러했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정 그렇다면 제대로 붙어보자는 식이다. 4. 드디어 시험을 친다(38-41장). 우선 38:4-38절까지 문제 수가 몇 개이며 몇 개나 답을 하고 몇 개나 맞출까? 크게 보면 9개, 작게 보면 37(혹은 39)개: 작게 보면 절수와 거의 비슷하다. 41장까지 가보면 거의 100문항인데 욥은 손도 대지 못한 백지 답안을 제출한다. 할 말이 전혀 없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얼마나 할 말이 많은가마는 언제가 그 하나님 앞에서 한 마디의 말도 할 필요가 없을 때가 올 것이다. 오직 감격에 겨운 찬양 외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5. 땅의 창조를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 건축: 도량(사이즈)을 정하는 것은 설계를 의미하고, 준승(척량줄)을 띄우는 것은 시공을 가리키는 셈이다. 지구가 우연하게 생겨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잘 설계된 건물과 같다. 아래의 글을 참조하자. 6. 땅의 창조에 욥이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최소한 방해놓지는 않았다, 아예 존재 자체가 없었으므로: 아버지의 질문에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장하다, 큰 일 했다’고 하실 거다. 7.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은 것과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건축 단계마다 있는 축제 중의 하나: 건물을 세울 때는 각 단계마다(기공식, 상량식, 준공식, 헌당식) 떠들썩하게 잔치를 하는 법이다. 8. ‘태에서 나옴’ ‘강보’라는 표현은 바다의 조성을 해산에 비유하는 말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옷을 입히듯이 바다를 만드셨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바다를 조성하실 때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문하신 것이 무엇인가? 절대로 육지를 침범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바다가 넘쳐서 육지를 덮어버리면 어떡하지? 포항의 송도에서 바다를 보며 자랄 때 이런 염려를 한 적이 있다. 안심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8, 11). 홍수가 나서 시내가 물바다가 되었을 때 송도에 사는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착한 사람이다. 그 판국에 남의 걱정까지 다 하고. 그러나 물에 잠길 염려가 전혀 없는 곳이 송도다! 시내는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송도에는 그런 일이 없다. 그러나 현대인의 오만이 그런 일을 가능케 하고 있으니, 장하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단다. 자랑스러운 과학문명이 언제 재앙의 원흉으로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9. 아침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했느냐고 묻는 걸까(12)? 동이 틀지어다: 새벽에게 명하여 그 처소에서 일어나 온 땅을 비추도록 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밤동안 설치던 악인들이 잠잠해진다. 이렇게 동이 터오는 것은 지구의 자전으로 말미암는 일이므로 ‘네가 자구의 자전을 명하였느냐?’ 즉 지구가 자전하도록 네가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10. 본문에 지구의 자전을 말하는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 14절: 고대의 도장은 진흙판에 한 바퀴 굴려서 찍는 것이었다. 지구가 그렇게 변화한다는 것은 자전을 내포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지구의 모습이 옷 같이 선명하게 드러남을 의미한다. ‘옷 같이’라는 말은 알록달록한 색깔이나 주름잡힌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 되면 지구의 그런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 일을 네가 해느냐는 것이다. 11. 깊은 물밑과 사망의 문이 무슨 관련이 있기에 함께 등장하는 걸까(16-17, 26:5-6)? 깊은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망을 가리켜 음부라고도 한다. 땅 속 깊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12. 욥의 나이가 얼마나 되길래 ‘나이가 많으니 그 정도는 알겠지?’ 하시는가(21)? 비꼬는 말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본문에 많이 등장하는 ‘알지? 있었지? 오래 살았지?’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13. 바다 근원이나 사망의 문은 그래도 어디쯤 있겠다는 방향 정도는 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광명과 흑암은 정말 어디에 있을까? 어차피 우리도 답을 하지 못한다. 왜 못하는지 한 마디라도 말해보자.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비추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래서 낮과 밤이 만들어졌다. 이 낮과 밤은 오늘의 낮과 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태양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낮과 밤이다. 이 낮과 밤도 모르고, 빛의 근원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의 처소가 어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14. 질문의 요지는 광명이나 흑암을 처소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지경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로 인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지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래야 질문의 뜻이라도 알아 들은 셈이다. 빛과 어두움의 경계선, 혹은 비유컨데 ‘일 터’: 마치 집에서 불러내어 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빛이 움직이면 경계선도 움직이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지만 비유컨데 집에서 나와서 직장에서 일을 다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처럼 그렇게 인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15. 눈이나 우박을 보관하는 곳을 곳간이나 창고라고 표현하는 것은 눈이나 우박을 아주 귀한 것으로 취급하는 셈이다(신 28:12)? 눈이나 우박이 뭐라고 그런 곳에 보관하는 걸까? 눈이 많이 오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눈이나 우박이 대기 중의 질소를 땅에 공급해주는 셈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땅에 내려주는 특별한 선물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전쟁이나 심판을 위한 무기 일 수도 있다(24, 출 9:22-26, 수 10:11). 16. ‘내가 살아있으니 하나님도 있는 것이지 내가 죽고 없으면 하나님이 어쩔 건데?’ 고등학생 시절에 어떤 불신친구가 던진 말이다. 무엇이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특히, 26절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세상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고, 자신이 죽고나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사람이 없는 땅에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란 사람의 존재유무에 따라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란 뜻이다. ‘넌 나고 싶어서 낳느냐?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려고 죽었는데 죽고보니 너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손바닥에 놓여져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대답해줬다. 17. 22-30절은 한 마디로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런가?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18. 묘성(황소 자리의 7개의 별)은 하나의 떨기(뭉치)이고, 삼성(오리온 자리의 가운데 세 별)은 띠로 매여져 있다는 말이다. 19. ‘번개를 보내서 네게 말을 전하게 할 수 있느냐?’는 이 물음에 오늘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무선통신: 벤자민 프랭클린은 최초로 연을 이용해 번개의 비밀을 알아냈고 1837년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모스는 전신기를 발명하고 전신부호를 고안해냈다. 전기 통신에 있어서 전류의 장, 단, 강, 약의 조합으로 문자를 전송하는 전신부호를 고안해낸 모스는 처음으로 전신기를 시험하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제자인 영국 출신의 발명가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전파로 보냈다. 20.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토록 목말라 하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번성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아느냐? 네가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전체적으로 보면 동문서답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다(동문서답이 아니라 바른 대답이다). 욥의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정말 자기 아버지가 맞느냐고 따지면 증거를 동원해서 증명해야 하나? 아니면 웃고 마는가? 욥이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꾸로 ‘네가 누구냐?’고 묻고 계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답다. 다른 신들에 대한 기록과 비교해보면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21. 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옳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셈이다. 옳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 네가 하나님을 아느냐? 너는 누구냐?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고 계속 물으신다. 그러면 잘못이 없음에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과응보, 상선벌악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욥의 수많은 질문도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끝인데? 22. 하나님은 지구의 기초와 설계, 바다의 경계와 통제, 아침 노을의 신비, 바다 속 신비, 빛과 어둠의 관계, 기후와 성좌의 신비, 기상 현상을 주관하셨다. 이와 대비되는 욥의 행위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부재, 무지, 무능: ‘어디 있었느냐? 아느냐? 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참고글: 간편하게 요약한 것임] 우리의 창조된 지구 - David V. Basset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