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7장


1. 엘리후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계속하는 중이다(36:26-37:24). 단순하게 머리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직접 만난 듯 정신이 없다(1):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워 떨었고, 떠나시기를 원했다(출 20:19, 눅 5:8). 그렇게 두렵기만 한 하나님을 예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로 우리 곁에 불러주셨다.

2.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예로 든 것이 무엇인가?

    천둥, 번개, 눈, 비(적은 비와 큰 비), 바람, 구름: 이것들이 단순한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주장이다. 자연법칙도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므로 자연법칙과 하나님의 섭리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자연의 법칙이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자연법칙에 맡겨두고 전혀 간여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일반은총이 있고 특별은총이 있듯이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연법칙에도 개입하셔서 뜻대로 운행할 수 있다(창 7:10-12, 수 10:12-13, 왕상 18:41-46, 마 14:25).

3.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기이하고, 하나님의 일은 헤아릴 수 없다(5). 그러니까 우쭐거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23-24).

4. 하나님께서 눈과 비로 사람의 손을 봉하신다(6-7).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일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조용히 물러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라는 것이다. 아니, 그러하고 눈과 비를 주신단다.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때로는 일에서 물러나 하나님을 묵상하고 느끼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눈과 비로 주신단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눈과 비를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눈과 비를 싫어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가?

5. 짐승들이 겨울잠을 자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게 하시기 때문(6-8): 생물 시간에는 ‘양식이 부족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하여’ 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눈과 비를 내려 사람의 손을 봉하게 하시고 짐승들은 겨울잠을 자게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것이 정답이다. 기온의 변화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에 따른 결과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6. 자연현상이 고대에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신비였지만 자연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그렇게 신비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도 대단하시지만 인간도 대단하다고 뻐기는 셈이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한 마디 해줄까?

    뉴턴의 말이 제격이다. 아인슈타인 이전 최고의 과학자이지만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바닷가에서 주은 예쁜 조개 껍질 하나’로 표현했다.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바다는 아직 들여다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세계라는 말이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뻐기는 모습은 갓 글자를 배워서 뻐기는 초등학생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가 모르는 것도 여전히 많다는 것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의 말이다.

7. 무엇이나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위대한 도구가 되겠지만 여기 본문을 근거로 하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자연현상 중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는 무엇인가?

    구름: 온 세상의(12) 징벌의 도구도 되고, 긍휼의 도구도 된다. 토지를 위한다는 것은 풍성한 열매를 주신다는 것이니 긍휼의 도구에 포함시키면 되겠다. 구름의 조성, 운행, 이용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8. 엘리후의 권유에 따르면 욥이 잘 생각해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 2가지는 무엇인가?

    욥의 어리석음(네가 아느냐, ∼할 수 있느냐?)과 하나님의 기묘하심

9. 엘리후는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우리는 모르겠다(19). 네가 알거든 가르쳐 다오.’라고 말한다. 엘리후가 언급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가(15-19)?

    구름에서 번개가 치는 것, 구름이 평평하게 뜬 것, 남풍이 불 때 따뜻한 까닭, 하늘이 펼쳐진 까닭: 이런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되는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인생이 알 수도 없고 따라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이스라엘의 남풍은 열풍이다. 폭풍처럼 야단스럽지는 않지만 더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청동을 주조해서 얇고 둥글게 펼쳐놓은 것처럼 여겼다.

10. ‘나는 머리가 나빠서 모르겠다. 똑똑한 네가 해봐라’ 이렇게 말하는 것(19)은 결코 자기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엘리후는 어느 정도로 똑똑한가?

    하나님께 해서는 안될 말을 하다가 멸망당하는 짓을 하지 않을만큼: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어떻게 하나님께 다 말씀드리겠는가? 낸들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는가?’ 다시 말하면 ‘당신보다 더 똑똑한 나도 가만히 있는데?’ 라는 말이다.

11.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수도 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지나가면 다시 태양이 보인다.’ 이런 말이야 누군들 못 하나? 이게 무슨 대단한 지혜라고?

    흔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의미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때로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 은혜에 대한 비유다.

12. 옛 사람들에게는 북방과 금은 아주 밀접한 관계이었던 모양이다. 미국의 서부를 생각하면 저절로 금이 연상되던 시절도 있었다(그 시절에 금을 찾으러 서부로 몰려간 사람들을 가리켜 forty-niner라고 한다. 1849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면 무엇이 연상된다는 말인가?

    위엄(22): 하나님에게 함부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지적인 셈이다(24b). 우리가 그 분을 어떻게 해볼 수도 없으니(23) 할 수 있는 일은 경외하는 것 뿐이다(24a).

13. 엘리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욥이 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욥기의 주인공이 욥이 아니란 증거다. 욥의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엘리후라는 바람잡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소개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요한처럼 하나님의 등장을 앞두고 엘리후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셈이다. 욥기 저자의 의도가 그런 것 같다.

14. 엘리후의 변론이 끝났다. 엘리후의 말은 맞는 말인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문제는 그 옳은 말이 욥을 위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옳다고 최선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로는 옳은 말이 사람을 잡는다. 옳은 말보다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름대로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수하거든 실수를 지적하기 전에 밥부터 사고,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조심스럽게 옳은 말을 한 마디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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