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4장


1. 엘리후가 부르는 ‘지혜 있는 자, 지식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

    불특정 소수: 욥이나 세 친구를 가리켜 하는 말은 아니다. 자기의 말을 듣고 판단하라는 선포형 서두이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는 표현(사 1:2)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은연중 자신도 지혜로운 자임을 내비친다(4절의 ‘우리끼리’).

2. 전장에서 엘리후는 욥의 문제점이 ‘교만’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서는 어떤 것을 문제로 지적하는가?

    원망(5-6, 9) 혹은 훼방: 욥이 ‘의로운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의 처사가 불만족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훼방하며, 무익하다’고 말했다고 비난한다. 5-6절은 그렇게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말을 하긴 했지만(9:22-24, 16:12-15, 27:2 등등) 엘리후가 말하는 의도와 같지는 않다. 그런 표현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아니다. 욥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피상적으로만 보고 나름대로 판단한 7-8절은 지나치다.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이란 측면에서 봄으로 다른 친구들보다는 한 수 위였으나 여기서는 다시 같은 수준으로 돌아와버렸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전지하심, 사랑, 교만한 자를 고통에 처함, 이런 사실을 들어 욥을 회개해야 할 죄인으로 몰아간다.

3. 우리 말에 ‘...을 밥 먹듯이’ 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유대식 표현이 있다면?

    물 마시듯(7): 훼방과 어울리려면 ‘뱉어내는’ 표현, 가령 ‘샘 솟듯이’와 같은 표현이 더 적절할텐데... 아무래도 물이 귀한 지역이다보니 이런 표현이 더 익숙한 모양이다. 목이 갈한 사람이 물만 보면 들이키듯이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뜻인가 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시 42:1)란 표현도 있구나.

4. 본문은 재판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1-9절의 내용은 재판의 어떤 부분에 해당하는가?

    고소: 지혜자들에게 욥에 대해서 판결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재판의 시작인 셈이다. 그러면 10-30절이 검사의 논고에 해당한다.

5. 엘리후의 말에 따르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토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음 각각의 구절에서 찾아보자, 10-12, 13, 14-15, 18-20, 21-27, 33.

    10-12: 공의로우신 하나님, 13: 창조주(=절대주권자), 14-15: 만물의 근원(사랑도), 18-20: 전능하신 하나님, 21-27: 전지하신 하나님, 33: 최고의 심판자.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자체가 불경, 혹은 신성모독이다.

    엘리후의 이 모든 대답이 틀린 것이 아님에도 욥에게 정확하게 맞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자식을 위해서 모든 고통과 시련을 감수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측면이 빠졌다. 또, 욥이 원망과 불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한 것은 아니다. 욥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24:18-25)

6. 욥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10-12)?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잘못하실 리가 없는데 그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았다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데...

7. 만물을 만드시고 유지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물의 기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신과 기운: 물질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네 가지 힘은 만유인력, 전자기력, 핵력, 약력인데 이런 힘이 한꺼번에 빠진다면 이 세상은 바람빠진 풍선이요, 끈이 끊어진 천막이다(참고, 벧후 3:10의 ‘풀어짐’). 만물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엘리후는 대단한 통찰력을 지녔다.

8. 엘리후의 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 있다면?

    자기만 생각하시고(14): 우리 인생을 돌아보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지만 자기만 생각하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9. 통치의 기본 중의 기본은 무엇인가?

    공의(17): 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란다. 교실에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나라를 다스림에서 있어서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10. 왕이나 귀인들에게 함부로 이런 말을 하시면(18)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나?

    여기서 왕이나 귀인은 통치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 등장한 것이다. 백성의 통치자로 등장했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높낮이가 있을 수 있고, 더 부유한 자가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11. 하나님을 떠난 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27)가 누릴 복(?)은 무엇인가(22-25)?

    숨을 곳도 없고(22), 시간을 끌 수도 없고(23), 빽도 소용없다(24): 실수도 없고, 지치지도 않는다. 이런 하나님께서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불평, 원망을 하느냐는 것이다. 죄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12. 29절의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란 표현은 대부분의 역본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로 번역했다. 개역성경이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침묵케 하다’란 말과 평강이 어떤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28절과 관련해서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침묵케 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감히 따질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 더 옳아보인다.

13.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참고, 신 31:17-18, 렘 33:5, 겔 39:23-24)? ‘얼굴이 안 보이지!’ 이러지 말고...

    멸망: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뜻이다. 버림을 당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필경 망할 수밖에 없다.

14. 엘리후는 재판에 관한 1인 3역을 했다. 고소인(1-9), 검사(10-30), 여기서는(31-37) 누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가?

    재판장: 하나님의 공의와 절대주권을 들어 욥을 비난한 후 이제 유죄판결을 내린다.

15. 악한 자들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29). 그런 자들 중에 누가 하나님께 잘못을 빌더냐(31-32)? 엘리후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욥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고 회개하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을 언급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욥에게 하는 말이다. 다시는 범죄치 않겠다고 말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만 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냐(37)는 공박이다.

16. 33절은 ‘하나님께서 네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판결을 싫어하느냐?’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될지 네가 판결해봐라: 은연 중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셈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리셨다고 해도 싫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무조건 회개하라는 뜻이다. 엘리후의 이 말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까? 아닌데!

17.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보면서도 끝까지 죽어봐라? 그런 의도는 아니다. 언제까지 이런 시험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걸까?

    욥이 회개할 때까지: 말은 험해도 빨리 회개하라는 의도이다. 엘리후의 확신도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회개할 때까지 고생을 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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