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장


1. ‘혀가 동한다’는 말은 ‘혀가 말을 한다’는 뜻이다. 마치 입 속에 갇혀 있던 혀가 이제 해방을 얻은 셈이다. 이 표현에 실린 엘리후의 감정과 의지는 무엇인가?

    (감정) 할 말이 많았지만 갇힌 혀처럼 억누르고 있었다. (의지) 이제 마음껏 뛰놀게 하리라: 타고난 말쟁이일까, 웃기는 인간일까? 두고 봐야겠지만 대단한 말솜씨임에는 틀림없다.

2.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겠노라(3)! 말을 하려면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아니면 뭐라고 하나? 남들도 다 하는 말이니까 생략하고? 뻔한 말이라도 해야 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뼈를 묻을 각오로 ... 등등.

3. 엘리후는 자신을 욥과 비교해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4-7). 이런 말을 하는 속뜻은 무엇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신을 힘입어 말한다: 자신의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은근히 내비친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욥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거나 더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잘한 것이다. 대화나 교제의 기본이다.

4. 욥의 말에 대한 엘리후의 요약, 혹은 느낌(9-11)은 정확할까?

    욥의 말(16:11-22, 27:1-23, 31:35-40 등)을 인용하기는 하는데 좀 주관적이다: 욥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할만큼의 죄는 짓지 않았다’는 정도였고(13:23-27, 14:4), 자기 의를 강변해도 그것은 탄식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음에도(13:4, 27:5)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준으로 다룬다. 표현은 비슷해도 수준이나 강도의 차이가 많이 다르다. 남의 말을 의도나 감정까지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대로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5. 욥이 의롭지 못하다고 엘리후가 제시한 근거는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는 사실이다(12).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도 헛일인가?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함을 인정한 1:8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그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의 행위를 순전하다고 인정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그 범위 안에서 인간은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면서도(롬 3:10) 의로운 삶을 살았다. 구원 문제에 관한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사람(=의인)은 없지만 예수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성화’의 문제다. 이 본문에서도 ‘의’가 의미하는 범주가 다르다. 의롭지 못한 인간이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롭지 못한 욥이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다! 엘리후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욥을 향해서 이렇게 용감하게 책망할 수 있었다.

6.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일을 일일이 설명하시지 않는다(13). 그러기에는 너무나 크신 분이시다. 엘리후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대답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욥의 불평(31:35, 13:3)을 공박함: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표준새번역) 객관적으로는 그렇다. 문제는 하나님과 욥의 사이가 그런 사이가(=남남이) 아니란 점이다. 대답하실 수도 있고, 그럴 마음도 하나님께 있음을 엘리후는 알지 못한 셈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응답하시는 것도 객관적인 관계를 떠나 부자지간처럼 친밀하게 대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7. 사람이 인식하든 말든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그 중의 하나가 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교훈하시려고(16): 욥의 고난도 이런 종류의 말씀이란 뜻이다. 즉 욥이 당한 고난이 꾀나 교만을 막아서 멸망치 않게 하시려는 연단의 의미가 있다(벧전 1:3-7)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의 주장과 전혀 다른 의견이다. 하나님의 의도에 훨씬 더 가까운 설명이다.

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 꿈 밖에 없을까?

    병상의 고통도 있다(19-22): 병상에서 곧 죽을 것만 같은 고통도 하나님의 징계, 곧 말씀하시는 하나의 방법이란 뜻에서 하는 말이다. 욥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9. 어떻게 해서 병상에서 다 죽어가던 사람의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게 회복되는가?

    해석자의 도움으로(23): 중보자가 있고, 대속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욥이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된다면 회복될 수 있다. 그런 일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천사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엘리후의 주장이다. 중보, 대속의 개념을 엘리후가 어떻게 알았는지 놀랍다.

10. 만약 욥이 회복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가?

    살은 어린 아이의 살, 하나님을 보게 됨, 의로워 짐(25-26): 지금 욥의 피부는 누더기와 같이 된 상태다. 다시 어린 아이의 살이 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요, 즐거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은 만사형통의 은혜를 받는 셈이다.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마저도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다.

11. 회복된 자가 부르는 노래의 핵심은 무엇인가?

    회개(27)와 감사(28): 시비를 바꾸었다는 것은 옳은 일을 그릇된 것으로 바꾸었지만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는 반성이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회복시키셨다는 감사의 노래다.

12. 29절의 ‘모든 일’이라 하나님께서 꿈으로, 병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의견에 대한 요약이다. 적용을 해보면 왜 욥이 고난을 당한다고?

    너를 살리려고(30).

13. 엘리후가 처음에는 아주 예의바른 젊은이처럼 굴더니 여기서는 무척 건방지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랑 닮았는가?

    풋내기 목사: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이 더 거룩한 존재요,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목사 말이다. 그래서 장로회가 아니라 목사회라는 말을 듣는 목사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혜를 주셨다는 거룩한(?) 자부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닐까?

    고난은 정화의 수단이다. 이렇게 정화되어야 할 욥의 결함은 교만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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