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2장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데 친구들이 대답을 그친 이유는 아마 구제불능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욥을 구제불능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자기들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틀 뿐이다. 그 틀에 맞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가령 돈밖에 없는 사람이 돈으로 안되는 일에 부닥치면 손을 들어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잘못이 없어도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다른 틀)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엘리후를 소개하는 말이 다른 친구들을 소개하는 말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라.

    더 자세하다: 족속을 밝히고, 아버지의 이름까지 소개했다. 그것은 엘리후가 더 중요한 인물인 것을 말해준다.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바라겔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뜻이다. 노인들의 말을 여태 경청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보면 잘 믿는 집안의 신실한 젊은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젊은 사람이 어른들 앞에서 화를 내도 괜찮은가?

    무엇에 대한 화인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섭리와 전능하심이 반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모세가 바로 앞에서, 엘리사가 왕에게(왕하 13:19), 예수님께서 성전에서(막 11:15-17) 화를 내셨다.

4. 엘리후가 노를 발한 이유가 무엇인가?

    욥의 말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한 것과 세 친구들은 욥의 잘못이 무엇인지 짚어내지도 못한 채 무리하게 자기 주장만 늘어놓았기 때문: 정말 엘리후를 화나게 한 사람은 욥이다. 욥에게 할 말을 참고 있었다(4). 욥의 긴 변론을 다 들으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5. 욥의 말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한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을까?

    욥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친구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죄가 없는데 이런 고생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인과응보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40:8에 따르면 엘리후의 말이 맞네! 결국은 욥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6. 엘리후가 기본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이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7) 어른을 알아보고 때를 기다렸단다(6): 능구렁이다. 할 말이 없어서 잠잠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르고 기다린 것은 자신의 연소함 때문이었다.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7. 여태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던 엘리후가 언제 ‘말을 하였다’는 말인가(7)? 많은 역본들은 7절을 ‘생각하기를’ 이라고 번역했다. 개역성경도 그런 뜻이 되도록 한 단어를 삽입해보자.

    내가 ‘속으로’ 말하기를: 다른 곳에서 흔히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되겠지만 노인들이 서로 변론할 동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자신보다 연로하신 어른들이 더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잠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8. 젊은 사람이 감히 대인, 노인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전능자의 기운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총명을 주셨다는 말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건방진 표현이다. 기존의 모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발언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판별하지? 욥과 친구들은 잠잠히 듣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봐야 한다.

9. 세 친구의 변론에 대해서 엘리후는 무엇이라고 비난하는가(13-14)?

    자기들이 하지 못했다고 해서 남들도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13): 자신들이 무지하여 욥의 잘못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도 욥을 이길 자는 하나님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욥을 추궁하겠다는 것이다(14).

10. 엘리후가 여기서 갑자기 욥의 친구들을 3인칭으로 대하는 것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발언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함인 것 같다.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분들이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15-16), 내가 할 말이 많고(18-20), 공정하기 때문이다(21-22):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이유를 욥의 친구들에게 설명을 했다면(1-14) 이제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셈이다(15-22). 33:1-7절은 욥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여태 조용하던 사람치고는 서론이 좀 장황하다.

11. 할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디에 비유하는가?

    봉한 포도주 =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새 가죽부대: 뚜껑만 따면 뻥하고 터지는 샴페인과 같다고 할까? 그렇게도 말이 하고 싶을까? 큰 교회에 소속된 어느 전도사님이 ‘설교하고 싶어죽겠는데 도무지 기회를 안 줘요’ 하더라. 설교하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는데 교회에서 기회를 안 주니까 그렇게 힘이 들더란다. 그런가 보다!!

12. 21절의 ‘보다’와 22절의 ‘취하다’는 원문상 같은 단어(나사, 들어올리다)다. 그러면 어떤 두 쌍의 단어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원문의 ‘나사’와 ‘아첨’이란 두 쌍이 교차되어 쓰였다. 히브리 문학의 큰 특징 중의 하나다. 서로 교차하여 반복함으로 의미를 분명하게 강조하는 방식이다. 직역을 하면 ‘내가 내 얼굴을 어떤 특정인에게 들어올리면(== 잘 대해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올리실(=죽게 하실) 것이기에 나는 결코 아첨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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