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0장


1. 30장은 29장과 아주 대조적이다(1, 9, 16절의 ‘이제는’). 행복했던 그 날들에 대한 추억이 29장이라면 고통스러운 현실이 30장이다. 29장의 욥을 ‘왕같은 욥’이라고 한다면 30장의 욥은 무엇이라고 할까?

    짐승같은 욥: 가장 비천한 사람의 조롱거리며 양떼를 지키는 개보다 못한 처지다.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란다(29).

2. 욥을 조롱하는 젊은이들의 아버지는 ‘개보다 못한 것들’이라고 말 해도 되는가?

    좀 다르다: 우리말의 그 표현은 아무런 쓸모도 없이 못된 짓만 하는 개를 가리키지만 ‘양떼를 지키는 개’는 아주 유능한 일꾼이라서 의미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

3. 2-8절은 젊은이들에 대한 묘사인가, 아니며 그 젊은이들의 아비들에 대한 묘사일까?

    젊은이들: 2절의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젊어서 손에 힘이 있을 듯 하지만 기력이 쇠하여<표준새번역>) 8절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란 표현이 근거가 될 수 있겠다.

4. 젊은이들이 기력이 쇠한 이유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어떤 것을 먹었는가?

    마른 흙, 짠 나물, 대싸리 뿌리: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 마른 흙이 제일 먼저 나왔으니 나머지는 흙보다 더 못한 것인가? 지금도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 흙을 먹는 아이들이 있단다. 옛날 우리도 이런 아픔을 겪었다. ‘찢어지도록 가난했다’는 말이 그런 흔적을 가진 표현이다. 양식이 없으니 풀을 많이 먹었고 결국은 변비가 생기고 똥구멍이 찢어졌다는 뜻이다.

5. 궁핍하여 도적질을 하려고 해도 힘이 없어서 실패하고 쫓겨나 결국은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런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이 무엇인가?

    욥을 조롱하는 것: 이렇게 형편없이 사는 사람들이 왜 욥을 조롱하고 미워할까? 자기들보다 더 못해 보여서? 욥이 이 사람들을 너무 비하한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결국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이런 자들에게서 조롱을 받는 처지가 되었는가 말이다. 8절의 ‘비천한’이란 직역하면 ‘이름이 없는’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 사회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지극히 천하다는 뜻이 된다.

6.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는(3-4) 것들이 나를 조롱하고 있다. 저런 인간들을 죽여, 말아?

    그럴 능력도 없지만 마음도 없다. 이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으니(11): 욥은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사람이 아니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느라고 이런 말을 할 사람에게는 차라리 ‘마귀의 장난’ 때문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애초에 사탄이 시작한 짓인데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욥의 고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내 줄은 늘어지고 무리는 굴레를 벗었단다(11). 굴레를 벗었으니 제 멋대로 날뛴다. 무리를 굴레 벗은 망아지에 비유하는 셈이다. 그러면 줄이 늘어져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욥의 현실을 무엇에다 비유하는 걸까?

    활: 팽팽하게 당겨진 활은 생명력을 의미한다(29:20, 창 49:24). 활의 줄이 늘어졌다는 것은 무력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8. 굴레를 벗은 자들이 제 멋대로 굴면서 하는 짓이 1) 내 우편에서 일어나 2) 내 발을 밀뜨리고 3)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는 것이다. ‘우편에서 일어나는 것’은 재판정에서 원고 노릇을 한다는 것이고, ‘발을 밀뜨리는 것’은 설 자리가 없도록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멸망시킬 길을 쌓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가리킬까?

    성을 함락시키려고 토성을 쌓아올리는 것(14): 역본에 따라 다소 의미가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보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단순하게 조롱하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아예 적극적으로 파멸시키려는 모양이다. 자기보다 못해지면 이렇게 짖밟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9. 성을 공격하여 파괴하듯이 무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니 영광도, 복록도 구름같이 사라지고, 놀람과 환난이 나를 움킨다. 마음은 녹아내린다. 이 장면을 보면 욥의 처지가 어떤 사람과 비슷한가?

    사로잡힌 왕: 전장에서 화려한 왕의 모습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 욥이 여기서는 은근히 점령당하여 온갖 치욕을 당한 왕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다.

10. 아픈 사람은 밤에 더 아프다. 온 세상이 고요해지면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문병은 한 밤중에 가는 것이 좋다! 18절의 ‘추하여져서’란 표현은 변형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내 옷을 변형시켜서 몸에 달라 붙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마치 천으로 시체를 둘둘 감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

    온 몸에 난 악창: 터지고 상처 난 곳에 고름이 말라붙고, 딱지가 앉아서 피부가 죄어드는 모습에 대한 비유다. 그러니 진흙에 던져져 진흙인지 사람인지 분간도 잘 되지 않는 형국이다.

11.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시고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대답도 않고 굽어보시기만 하시니 이제 욥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끌어가시는 곳으로 기꺼이 가겠단다(23). 이런 상황에서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욥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아니하셔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성도도 있더라. 아마 성도가 아니란 뜻 아닐까?

12. 욥은 은근히 투정을 부리는 셈이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자신보다 못한 분이신가?

    자기는 고생하는 사람을 위해서 울고, 빈궁한 자를 위해서 근심했는데(25) 이제 손을 펴고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24) 하나님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3.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화가 임한다면(26) 누가 복받을 짓을 하겠는가?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당연하다(27). 욥이 이런 탄식을 뱉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는지 놀랍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생각을 정리해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어느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

    사 5:2(...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그리고 롬 8:28... : 하나님도 이런 욥의 심정을 잘 아신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어서 곧 아름답게 마무리될 것을 우리는 안다. 조금만 더 참으라고 응원을 하면된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조금 더 인내하면 선으로 갚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끝까지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4. 햇볕에 쬐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다 타버렸다면 감사할 일인가? 힘 안 들이고 선탠한 셈 아닌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가령, ‘(돈을) 쓰지도 않았는데 다 없어졌다’면 도둑 맞았거나 엉뚱한 곳에 썼거나, 좌우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뜻이다. 햇볕에 검게 탄 피부는 건강미가 넘치겠지만 욥의 검은 피부는 온갖 피부병에 재가 덮인 것이다.

15. 왜 하필이면 이리와 타조일까?

    이리의 울음소리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느끼게 하고, 타조의 울음소리는 목이 쉰듯 애절하고 시끄럽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어도 ‘어느 동네 개가 짖느냐?’는 식의 반응 뿐이다.

16. 욥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다.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혈전을 치르고 이긴 시합의 비디오를 보면서 아무리 많은 골을 먹어도 별로 걱정이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욥의 이야기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울 때 어떤 도움이 될까?

    성도의 삶은 결론을 아는 삶이다: 절대로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은 승리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빌 1:6). 예수님의 수난을 보면서도 그 분의 승리와 부활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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