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장


1. 비사란 비유란 뜻인데 욥이 무엇을 어디에 비유했는가?

    비유라기보다는 격언, 잠언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교훈적인 말을 이어갔다는 뜻이다.

2. 욥은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4-6). 그것은 무엇처럼 확실한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2절의 핵심은 ‘전능자의 사심’에 있다. 영어나 히브리어에서는 이 표현이 먼저 나오고, 하나님을 수식하는 표현이 부속품처럼 뒤에 나온다(As surely as God lives, who ∼). 나를 이렇게 취급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확실한 것처럼 자신의 무죄도 확실하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조금만 닥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 있느냐는 우리네 신앙과는 차원이 많이 다르다.

3.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면 될텐데 왜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이란 표현을 거듭해서 덧붙였을까?

    시비, 유혹: 어차피 자신의 진정을 알아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 하나님을 자극하려는 의도 아닐까? 빨리 오셔서 한 말씀 해주시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이 진정으로 욥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아니다. 이 표현과 관련된 더 이상의 원망이나 시비가 없다.

4. 개역성경은 3절이 2절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다른 번역본들은 3절이 4절과 이어져 있다. 그러면 마지막의 ‘있느니라’를 어떻게 고치면 될까?

    있는 한: 5절의 ‘죽기 전에는’ 이라는 표현과 통한다. 극도의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굳게 확신하는 욥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럴까? 참으로 존경스런 모습이다.

5. 죽으면 죽었지 ‘불의를 말하지 않겠다’? ‘일평생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겠다’? 이 말은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불의를 행한 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친구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5): 친구들의 말에 동조하는 말이 곧 불의라는 것이다. 친구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징계를 받을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주장에 굴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

6. 일반적으로 논쟁을 하거나 싸우면 ‘대적은 악인이다’. 그런데 욥은 ‘대적은 악인같이 되기를’ 원한단다! 이 표현이 대적을 악인이라고 단정짓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악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악인이 벌을 받는 것같이 벌받기를 원한다는 말인데 더 이상 나의 대적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나를 불의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로 몰아부치지 말라는 말이다.

7. 사곡한 자라고 해서 반드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런 자들이 더 이익을 많이 보기도 한다. 아무리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신다. 최소한 언제 공의가 시행되는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실 때: 악한 자들이 잘 되고 잘 사는 꼴을 계속 봐야 하나? 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지금 원수를 좀 갚아 주시면 안되나?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그건 니 생각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8. 적어도 욥의 생각에는 이익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불러 아뢰는 것을 들으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물질적인 이익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온갖 고통 속에 허덕이면서도 이런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만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자격이 있다.

9. 성경을 100독이나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이단으로 빠져 감옥에 갔단다. 30대 초반에 이미 100독을 했다니까 믿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경을 많이 읽긴 읽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욥의 말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이 읽으면 뭘 하나. 바르게 읽어야지: 욥은 친구들의 지식과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친구들도 볼 것은 다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가? 보면 뭘 하나, 제대로 봐야지! 다른 것은 다 제대로 본 모양인데 욥을 제대로 보지 못했나보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습자의 능력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이다. 학습자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아는 것만 열심히 퍼부어대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10. 아무리 악인이라도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며 살다가 가는 수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 욥은 그런 자들이 실제로 있으므로 인과응보나 악한 자들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것과는 다른 주장을 펴왔다. 그런 욥이 이제 친구들의 주장처럼 악인에게는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말이 이렇게 바뀌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2-6절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자신이 당한 일이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란 확신이 섰기 때문: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려 있으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설교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을 본보기로 삼고 그렇게 설교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보통의 확신을 훨씬 뛰어넘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친구들의 주장이 자신의 경우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반대주장을 폈으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친구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욥도 알고 있다. 자신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욥이 자기의 죄로 말마암아 이렇게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제 친구들보다 더 자세하게 악인이 받는 벌을 설명하는 것이다.

11. 악인의 융성함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자식이 안되기 때문: 자손의 번성은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다. 온갖 호사를 다 누렸더라도 자식이 끊어진다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 아니란 확신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12. 악인의 자손이 많은 것이 잔칫날 잡으려고 돼지를 살찌우는 것과 어떤 점에서 닮았는가?

    자식이 많아봐야 ‘칼을 위함’이기 때문: 칼을 위함이라는 말은 칼이 쓸모 있으라고 자식이 번성한다는 말인데 결국은 칼에 죽는다는 말이다. 악인의 자손이 번성해봐야 결국은 살륙(전쟁), 굶주림, 염병으로 다 사라지고 만다.

13. 과부들이 왜 울지 못할까(15)?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장례의 필수요건인 애곡을 의미하는 말이다(참고, 시 78:64). 살륙(전쟁), 굶주림, 염병으로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정상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14. 악인의 재물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되면 그 대단한 재물이 무엇과 같을까?

    티끌, 진흙, 좀의 집, 초막: 주변을 돌아보면 악인의 재물을 누리며 잘 사는 모습이 적지 않겠지만 순식간에 무너진 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악한 방법으로 쌓은 재물이다.

15. 살륙(전쟁), 굶주림, 염병이 악인의 자손을 멸한다(14-15)고 했는데 악인들을 추격하는 또 다른 팀이 있다. 구성원들이 누구인가?

    두려움, 폭풍, 동풍: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좋은 것들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졌다고 해도 사기가 꺾인 군인은 싸울 수가 없다. 폭풍의 두려움은 우리도 잘 안다. 근동에서는 동풍이 무섭다. 이스라엘의 동편지역은 높은 산악지대다. 거기서 불어오는 동풍은 뜨겁고 건조해서 모든 식물을 말려버린다.

16. 악인의 최후는 한 마디로 무엇인가?

    비소(=경멸, 조롱)거리(23): 악인이 아무리 잘 나간다 싶어도, 부러워할 만큼 잘 산다고 해도 결국은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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