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4장


1. 2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24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부르짖는 셈인가?

    하나님 언제까지니이까?(1): 부자들이 하는 악한 짓에 대해서 언제까지 두고 보실 것이냐고 탄식하고 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반드시 심판하실 날이 있다는 것은 확신한다(23-25)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언제까지 침묵하실 것인지는 많은 성도들의 관심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욥이 어떤 답을 듣게 되는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모든 해답을 얻게 된다. 하박국도 그랬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해결책을 주셨다. 극히 개인적인 만남을 허락하셨다. 벧후 3:8-13도 참고하자.

2. 악한 자들이 하는 짓거리(2-4)가 특히 나쁜 이유를 몇 가지 짚어보자.

    율법 위반, 가난한 자의 마지막 소유를 빼앗는 것: 지계표를 옮기거나 양떼를 빼앗아 기르는 행위는 폭력적인 행위인데 특히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신 19:14). 고아의 나귀나 과부의 소는 마지막 재산이요, 유일하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돌보아주라(신 24:17)고 당부한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인데(시 68:5) 무시하다니 도대체 겁이 없다.

3.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쫓겨나는 사람들은 거의가 빈민들이다. 빈민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화재를 일으키기도 하는 모양이더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나보다.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비슷한 짓을 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은 무엇인가?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것(4): 아마도 부자들이 다니는 데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이지. 아니면 보기 싫다고 쫓아내었든지. 예전에 대통령이라는 분이 소경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보기 싫다고 해서 영영 사라진 가수가 있었다. 이용복이었던가? 자신을 닮았다고 출연을 제지당한 탤런트도 있었다. 있는 자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결국은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어버린다(4b).

4. 가난한 자들은 어떤 점에서 들 나귀와 같다고 하는가?

    풀이 거의 없는 광야에서 먹을 것을 찾아서 헤매기 때문: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제대로 구할 수 없다.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낸들(5) 그게 얼마나 되겠는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쫓겨나 숨어 지내며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헤매는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여기는 것 아닐까?

5. 광야에서 충분한 양식을 구할 수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는가?

    도둑질?(6): 힘있는 사람은 훔쳐도 크게 훔치지만 가난한 자들은 훔쳐봐도 극히 적은 것이다. 남의 곡식을 베어 봐야 얼마나 베겠는가! ‘남의 곡식’을 벤다는 말이 일종의 도둑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혼합된 가축 사료’를 의미할 수도 있단다. ‘악인의 남겨 둔 포도’도 별 것 아닌 것을 의미한다. 원래 추수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얼마를 남겨야 한다(레 19:10, 신 24:21). 그렇지만 악인이 이 규정을 따라 얼마나 남겨두었겠는가! 결국 이 세 가지 표현(5-6)은 양식으로 쓸 것이 극히 적다는 뜻이다.

6. 가난한 자들의 곤한 삶을 묘사한 5-8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힘있는 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았다. 의복이 없는 것도 악인들에게 볼모 잡혔기 때문이다(9). 바위를 안고 있다는 말은 아마도 바위를 거처로 삼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7. 고약한 사람들은 담보를 잡을 때라도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보아주지 않는다. 아니, 어려운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들어야 담보의 효력이 있다. 그래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가?

    어미 품의 고아(=아버지가 없는 젖먹이)나 옷(다른 많은 역본은 ‘옷’이 아니라 ‘젖먹이’로 번역함): 율법을 위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잔인하다. 예나 지금이나! 빚지지 않아야 한다. 빚을 무서워해야 한다. 빚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담보로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IMF를 겪으며 빚으로 말미암아 끔찍한 일들이 적지 않게 벌어졌다.

8. 젖먹이를 볼모로 잡고 일을 시키는 사람이 제대로 삯을 주며 일할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는 것은 뻔한 일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어떻게 부리는가?

    작업복도 없고, 굶주리며, 목마른 상태로 부린다: 10절의 옷은 작업복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야말로 열악한 작업환경을 말하는 셈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가난한 이웃도 먹여 살려야하는 판에 일하는 자를 굶긴다는 것은 정말 악한 짓이다. 곡식단을 매면서 주리는 것이나 술 틀을 밟으면서 목이 마르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쉬우지 말라(신 25:4)고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9. 욥은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서 이런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지적한 장소를다 찾아보자.

    광야(5), 시골(6), 산골(8), 농장(10-11), 그리고 도시(12): 사람들이 사는 모든 곳에서 이런 악이 행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런 하나님이시니 자신이 이렇게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계신다. 미치겠다! 어쨌거나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세상의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로 시선이 옮아간다. 자신만의 고난이 아니라 이웃의 고난에 눈을 뜨고 있는 셈이다.

10. 악한 자들도 종류가 다양하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 외에 또 어떤 악한 자들이 있는가(14-16)?

    살인자, 도적(14), 간음하는 자(15), 강도(16):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를 왜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시는가? 밤에는 도적이고 새벽에는 살인자다. 왜 새벽일까? 새벽에 일어난 사람을 노리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이기보다는 궁핍하여 새벽부터 일을 해야 하는 어려운 사람을 노린다. 간음하는 자가 변장하고 밤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강도가 낮에 문을 닫고(잠그고)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인간을 겁내기 때문이다.

11. 밤에 설치는 자들이 아침을 흑암같이 여긴다는 말은 악한 자들의 입장에서본 말인데 아침을 두렵게 여긴다는 뜻이다. 더 이상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흑암의 두려움’은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말이다. 아침을 두렵게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슨 뜻이 되는가?

    흑암의 평안함: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시간에 이들은 변장하고 숨어다니며 오히려 평안하다. 밤이 친숙하다. 놀기 좋다!

12. 불의한 자들이 이렇게 부당한 짓을 행하는데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냐고 원망을 하던 욥이 그럼에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본심은 무엇인가(25)?

    악인의 최후가 속히 임함: 강물에 떠내려 가듯이, 눈이 녹듯이 사라져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20).

13. 이사야의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사 49:15)’는 말씀을 참고하면 ‘태가 그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악인들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잊을 수 없는 자들에게서조차 잊혀질 것이다. 구더기나 좋아할까! 현재로서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욥의 소망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14. 악한 자들이 순식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인가, 평안을 누린다는 말인가(22-24)?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는 괴리감 때문에 욥이 횡설수설하는 듯이 보인다.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죽을 자도 살아나고, 평안하다. 그러나 그들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길은 여전하고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이다. 갈팡질팡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변론을 마친다. 욥의 신앙이 약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일지 모른다. 병이 나을지, 재산이 늘어날지,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지... 이런 일의 결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가령, ‘이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올바른 확신이 아니다. 강력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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