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3장


1.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슬퍼도 울지 말고, 아파도 신음하지 말아야 하는가?

    슬프면 울고, 아프면 신음해야지(2): 억지로 참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슬픔을 슬픔으로 느끼지 못하거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 혹은 큰 아픔도 작게 느끼는 것이 신앙이다. 때로는 아플 수도 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불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감정도 없는 비인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현재, 욥의 가장 큰 아픔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함: 성도에게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것은 가장 큰 아픔이요 두려움이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욥의 위대함이다(10). 엘리바스의 말도 되지 않는 비난을 들으면서 그를 원망하기보다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버렸다. 일일이 대꾸하면 입만 아프지... 그러면서도 대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인데!

3.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욥의 진심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 하나님은 욥의 말을 들어주실까?

    하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 틀림없다고 욥은 확신했다. 욥의 생각도 많이 변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을 사냥꾼(6:4, 10:16), 약탈자(9:12), 살인자(13:15)라고 표현했다. 점차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하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 틀림없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만날 길이 없다는 것(3).

5. 조선시대에 신문고를 두드리려는 사람,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호소한 바울, 그리고 욥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자신의 무죄를 확신한다는 점(27절의 ‘정직자’는 바로 자신을 뜻함): 죄가 있으면서 이렇게 나섰다가 발각되면 능지처참이다.

6. 욥은 하나님을 ‘자신의 말을 들어주시고 자신의 억울함을 벗겨 주실 자’로 믿고 있다(6-7). 여기서 잠간, 후일에 욥은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는가?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38-41장)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42:3-5): 하나님은 변론의 대상자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일 뿐임을 진실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욥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의 말대로 단련되어 더 나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뿐이다. 고기를 많이 잡고 난 다음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비교해보라.

7. 도무지 만날 수도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이지만 욥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의 고난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10): 자신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결국에는 정금같이 나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8.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이 고난이 징계가 아니라 자신을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욥에게서 찾는다면?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11-12)이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고난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60 혹은 70% 정도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를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100%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육체를 입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싶다.

9.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이 결국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만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분의 일정한 뜻(13): 한번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뜻을 이루고 마시는 분이시니 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관성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경우(기분)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면 아이들 교육에 문제가 많다. 아이들이 부모를 우습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해진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기르면 아이들이 부모의 말씀을 무겁게 여긴다.

10. 나를 철저하게 아시는 그 하나님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욥의 절망이기도 하고, 나아가 인류의 절망이기도! 소위 ‘숨어 계시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걸까?

    결국은 스스로 찾아오신다: 찾아오신 하나님(예수님의 도성인신), 계시하시는 하나님(성경을 주심)이 해결책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인류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씀을 주셔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셔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1. 욥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본문을 읽으면서 크게 위로를 받다가도 ‘아니야, 난 욥처럼 그렇게 말할 수 없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욥이 스스로 정직자라고 말할 만큼 정직하게 산 것(7, 11-12)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욥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도덕적으로 욥이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높은 수준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을 정직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게 된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살피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힙입어 담대하게 나올 수 있게 하셨으니(엡 3:12, 히 10:19)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죄책감으로 기죽어 있는 모습보다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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