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장 |
하나님께 교만함(2-4), 이웃에 대한 불의와 횡포(6-9). 2. 엘리바스는 지혜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스스로 유익하다고 함: 자신에게는 유익하다고 한다. 좀 짜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3. 사람이 아무리 지혜로운들, 의로운들, 온전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혜나 능력에 관한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말이 어떻게 틀렸는가? 사람의 지혜나 의로움이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사람의 악함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은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갓난아이가 지혜나 능력으로 따지자면 어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부모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한 존재인 것은 지혜나 능력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인 것은 ‘그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존재, 곧, 자녀요 신부이기 때문이다! 4. 4절은 비꼬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며 심문하시는 이유는 절대로 무엇 때문은 아니다? 너의 경외함: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냐? 아니다. 바로 너의 그 교만함,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고,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는 그 교만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5.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이 그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면서 비교적 점잖게 말을 꺼냈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 말과 6-9절을 비교해 보자. 처음에는 일반적인 얘기, 즉 구체적인 사례는 알지 못하고 추측으로 말한 것이다. 이제는 구체적인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이다. 전자는 잘 모르지만 짐작으로 하는 얘기고, 후자는 현장을 자세히 목격한 사람이 감추지 않고 폭로하는 격이다. 6. 엘리바스는 욥의 악한 행위를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욥이 그런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말을 하는가? 결과를 보고 원인을 함부로 짐작하여 마치 목격한 것처럼 말함: 결과를 보고 원인을 그렇게 짐작할 만큼 인간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렇게 단순하게 짐작해서 떠벌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하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상이나 생각을 마치 직접 목격한 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7. 엘리바스가 말하는 현실(10-11)은 맞다. 그러나 그 원인(5-9)은 옳지 않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남의 일을 짐작하면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잘된 일이나 잘못된 일을 막론하고 이유를 함부로 짐작하는 것은 틀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주 조심해야할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8. 엘리바스가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12)? 모르는 것이 없다(↔ 13-14, 17): 멀리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그 분께서 너의 악함을 어찌 모르겠느냐는 것이다. 9. 이상하다? 욥이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욥의 어떤 주장을 엘리바스가 이런 식으로 들었을까? 범죄한 것이 아닌데 범죄자처럼 고난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욥의 일관된 주장): 이 말이 엘리바스에게는 욥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13-14)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남의 말을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우도 흔하다. 욥이 부인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10. 어리석은 사람들의 주장 중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 이후 자연법칙에 맡겨두시고 전혀 관심도 없고, 간섭하지도 않으신다’는 말이 있다. 그런 뜻이 담긴 표현이 본문에 어디 있는가?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14): 이와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 더러 있다. 한결같이 악한 자들이 하는 말이다. 11.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갔던 길일까? 가인의 길, 라멕의 길, 홍수 심판을 받은 자의 길, 소돔 고모라의 길: 욥의 시대에서 옛적이라고 하면 이 정도의 예가 될 것인데 엘리바스의 말이 험하다. 이 악한 자들은 때가 되기 전에 죽임을 당하고 집은 뒤집혀 묻혀버렸다(16). 12. 악인들이 못된 소리를 하는데도(17)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다(18). 이 말은 욥의 말과 같다(21:16). 엘리바스도 같은 뜻으로 하는 말일까? 다르다: 욥의 의도는 악한 자들이 복을 누리더라는 것이다. 반면에 엘리바스의 의도는 악한 자들의 복이 길지 않고, 누리지도 못한다(=16, 20)는 것으로 서로 다르다. 욥의 말을 인용하여 욥의 의도와는 다른 의도로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다. 13. 의인이 보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일까(19)?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일시적인 풍요(18)와 순식간의 파멸(16, 20): 엘리바스가 생각하는(=이론상으로) 악한 자의 모습이다. 욥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21:7-14, 17-20). 넓게 보면(=내세까지) 엘리바스의 말이 확실히 맞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욥의 말이 더 맞을 수도 있다. 14.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면 복이 임하는가(21)? 당연지사다: 문제는 욥의 경우에 맞지 않다는 점이다. 욥은 지금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엘리바스의 일반론이 틀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요지로 이 본문을 근거로 설교를 하면 어떨까?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굳이 이 본문을 쓸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말하는 다른 본문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15.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가(21-29)? 그렇다면 2-3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엘리바스의 입장에서는 논리적 모순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노력을 귀하게 받아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결국은 사람을 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이다. 엘리바스가 이렇게 이해하고 말했을까? 16. 보배와 금을 버리라고(24)? 욥으로 하여금 부정한 방법으로(6-9) 재물을 긁어모으게 한 욥의 탐욕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욥의 입장에서는 버릴 보배와 금이 전혀 없는 셈이다. 17. 일반론으로 보면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배와 금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배가 되신다(24-25).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배가 되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 관계 회복: 서로 기뻐하는 사이가 되는 것, 그래서 마주보기도 하고 대화가 되기도 한다(26-28). 18.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엘리바스는 말을 맺는다(29-30). 원문상 29절의 ‘낮춤을 받거든’의 주어는 3인칭 복수다. 사람들이 쓰러지거든 ‘(그것이 교만 때문이니 겸손하면) 높아지리라’고 말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욥이 깨끗하게 되면 욥으로 말미암아 무죄하지 아니한 자도 건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이 결국은 누구에게 맞아들어 가는가? 욥의 친구들(42:7-8): 죄없는 욥을 비난한 친구들을 위하여 욥이 기도하였더니 그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