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장


1. 친구들이 왜 위로가 필요한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너희의 위로’에서 너희를 목적격으로 보면 친구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뜻이 된다. 위로하려고 찾아와서 거꾸로 번뇌케만 하고 있으니 욥이 위로해 주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 말을 잘 들어 보게 그러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일세’라는 의미다(=내가 너희에게 주는 위로).

    그러나 ‘너희를’ 주격으로 보면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너희가 내게 주는 위로). 원래 소유격은 의미가 다양해서 이렇게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은 문맥을 따를 밖에 없는데 양쪽이 다 가능해보인다. 양쪽이 다 화가 난 상태이니까.

2. 욥이 만약 어떤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이렇게까지 녹아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투로 말한다(4).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에게 원망하면서 마음이 이렇게 녹아내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는 것이야 걱정할 게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은 피할 방법도 없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두렵지 않지만 하나님은 두렵다! 당장 내가 겪은 고난을 보라. 무슨 할 말이 있는가(5-6)!

3. 친구들이 생각하는 악인의 삶과 욥이 생각하는 악인의 삶이 다르다. 7절과 8절이 친구들의 주장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자(15:20-35, 18:19, 20:10)

    악인의 수명이 짧다는 엘리바스의 말(15:33-35), 악인의 후손이 끊길 것이라는 빌닷의 말(18:19), 악인의 재물이 길게 가지 않는다는 소발의 말(20:10)에 대한 반론이다. 욥이 보기에는 친구들의 말처럼 악인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론은 친구들 쪽인데 현실은 아무래도 욥 쪽이다. 악하다고 반드시 벌을 받고, 선한다고 반드시 복을 받는 기계론적인 세상은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만드셨을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무슨 재미로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만드실까? 골치 아픈 마누라 대신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로보트와 산다면 어떨까? 그게 소원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우리 인생이 너무 불쌍해진다.

4. 욥이 보기에는 ‘악인이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고 악인의 씨가 굳게 서더라’는 것이다(7-8). 악인의 형통함을 노래하는 것(9-13)을 반대로 보면 무슨 뜻인가?

    의로운 자신은 곧 죽을 판이고, 자식들마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역설적인 반항이다.

5. 악인이 누리는 복은 가축의 번성, 아이들의 즐거움, 그 외에 또 있는가?

    경각간의 죽음: 죽을 때도 고통없이 죽더라는 것이다. 욥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전부 자신의 형편과 대비되는 것이다. 가축과 자녀들을 물론이고 죽음도 그러하다. 자신은 온갖 고통 속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아무런 고통도, 병도 없이 죽을 때가 되어 잘도 죽는구나!

6. 소고와 수금과 피리를 현대 표현으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관현악이 어떨까? 소고는 타악기, 수금은 현악기, 피리는 관악기다. 현대의 오케스트라와는 규모가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이 세 종류의 악기가 어울리는 것은 엄청난 기쁨을 주는 것이다. 세상에, 악인들이 저렇게 즐거운 인생을 보내는 동안 의로운 욥은 상처를 기와로 긁으며 신음 소리나 내고 있으니...

7. 온갖 복을 다 누리며 즐거운 인생을 사는 자들을 왜 악인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14-15). 그렇게 즐거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다. 무슨 이익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는다.

8.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서 말하다가 문득 욥이 자신을 악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가(16)?

    악한 자들은 그들이 누리는 복이 자신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 즉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 반면에 욥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는다.

9. 친구들이 말하는 악인의 말로에 대해서 욥은 할 말이 많다(17-21).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선하게 살면 자녀들이 복을 받고 아버지가 선하게 살지 못하면 자녀들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특히 한국인에게 위력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욥이 이런 말도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고난 다음에 누가 복을 받건 저주를 받건 죽은 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21)? 살아생전에 자신의 죄악에 대한 징벌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19-20). 다음 구절을 참고하면 욥의 이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 5:9-10]

10. 친구들의 원론적인 비난에 동의하지 못하는 욥의 주장도 현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19-21절이 당위성을 말할 뿐 세상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욥은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왜?

    하나님은 어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22): 창조주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하는 말 악인의 복이 길지 않고 곧 심판을 당한다는 말에는 반발이 거세다(23-26).

11.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다(23)는 것은 죽을 때까지 기운이 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복을 누린 사람이나, 평생 고생만 한 사람도 죽으면 똑 같다(26). 욥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평생 복을 누린 악인이 별다른 심판이 없더라: 그러니 친구들의 주장이 틀린 것 아니냐는 말이다.

12. 친구들의 위로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위로는커녕 조롱이라고 하더니(3) 이제는 어떤 더 격한 표현을 써서 비난하는가?

    궤휼(음모, 27 = 34절의 거짓): 아예 의도적으로 자신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다. 욥도 많이 과격해졌구나. 극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못할까? 위로를 하려고 한다면 이런 심경을 이해하고 위로 하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팔이 의사(13:4), 번뇌케 하는 위로자(16:2)를 넘어서 거짓말쟁이(21:34)가 된다.

13. ‘왕후의 집’과 ‘악인의 거하던 장막’(28)은 동의어다. 친구들이 말하는 악인의 말로는 순식간에 망하는 것인데 길가는 사람들(=견문이 넓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무슨 답이 나올까?

    욥이 기대하는 답은 ‘악인의 장막이 건재하더라’는 것(=30): 친구들의 주장이 틀린 증거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자들에게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잘 있더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의 날에 심판하려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30절은 악인이 현실에서 순식간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14. 31-33절은 ‘악한 자들을 아무도 갋을 수 없었지만 결국은 죽었다’는 뜻인가? 욥이 말하는 문맥은 그렇지 않은데?

    심판 없이 평안히 죽었다는 뜻: 무덤에 장사되고 무덤을 지키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된 죽음이란 뜻이다. ‘심판을 받는다면 시체가 버려져야지!’라는 것이 욥의 의도다. 33절은 많은 사람이 따르는 장례 행렬을 묘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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