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9장


1.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려고 말을 꺼냈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의 말이 욥에게 위로가 아니라 무엇이 되었는가?

    학대: 위로한다고 한 말이 욥을 번뇌케 하며,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 셈이 되었다. 그래서 욥은 단도직입적으로(↔16:1-3) 친구들의 변론이 무자비하다고 힐책한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사람을 실망케 하는 일도 많다. 의도도 좋아야 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지혜, 혹은 능력도 필요하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좋은데 실속이 없다는 것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2. 친구를 이렇게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않다니(3)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이 다르기 때문 = 욥의 생각일 뿐: 친구들은 욥을 학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겠다고 열심을 내고 있는데 학대라니? 비록 아프더라도 돌이키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도 예사롭게 행하게 만든다.

3. 허물이 내게만 있다는 것(4)이 무슨 뜻일까?

    혹 허물이 있다고 한들 그게 너희들에게 무슨 해를 끼쳤다고 이렇게 나를 들볶느냐?

4. 욥의 말은 허물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 욥이 처한 현실이 친구들의 보기에는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겠지만 욥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이지 너희들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큼 욥은 자신의 행위에 자신이 있었다.

5. 친구들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하나님께서 욥을 그물로 에워싸셨단다(6). 물고기나 짐승을 잡듯이! 7-12는 하나님의 징계를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 셈인가?

    전쟁터의 적군: 아무리 부르짖고 간구해도 적군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처럼 대답도 없이 나를 포위하고(10, 12) 누르시고 계시니 답답하지만 참을 수밖에! 실제로는 적군이 아닌데 그렇게 부르짖고 간구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다니...

    참고 [ 포학 = 학대, 내 길을 막아 = 길에 울타리를 세움, 첩경에 흑암 = 길에 지뢰를 매설함, 헐으시니 = 성벽을 허뭄, 나무 뽑듯 = 장막의 말뚝을 뽑음, 길을 수축하고 = 성벽에 이르는 경사로를 쌓음 ]

6.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판에 많은 사람들이 욥을 떠났다(13-14). 진정 위로가 필요한 시점에 다들 떠나버렸다. 누가 어려움에 빠진 욥을 돌아보지 않고 떠났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생각해 보자.

    형제들, 친척, 가까운 친구: 혼자 살면 되지? 사람은 묘하게도 혼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다워진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느낌? 군중 속의 고독? 이게 얼마만한 고통일까?

7. 온갖 부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욥이 얼마나 비천하게 되었는가?

    계집 종에게마저 무시당하고 어린아이들마저 조롱함: 아마 욥의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이가 계집 종 아니었을까? 이런 계집 종에게조차 사정해야 했으니...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은 지금이야 아이들이 어른을 조롱하기도 하겠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8. 부부는 일심동체라? 그래서 서로의 단점마저 거부해서는 안 된다? 입 냄새가 나도 입을 맞출까? 술 냄새가 푹푹 나도 잠자리를 함께 할까? 왜 욥의 아내가 남편의 숨을 싫어했을까?

    아마 숨쉴 때마다 악취가 났기 때문 아닐까? 입 냄새가 나는 신랑이 입을 맞추자면 ‘양치질부터 하고 오라’고 떼미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욥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했을 것이다.

9. 욥의 불행을 동포들마저 싫어한다고? 동포들이란 단어의 히브리 말은 ‘나의 태의 아들들’이라는 말이다. 욥의 자녀들은 이미 다 죽었다. 그러면 이 표현은 누구를 의미할까?

    대부분의 역본들은 친형제라고 번역함: ‘나의 (어머니의) 태의 아들들’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편이 자연스럽다.

10. 피골이 상접한 사람을 멀리서 보면 제일 잘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하얀 이빨 아닐까? 피골이 상접하여 누워 있는 욥은 허연 이빨만 드러낸 채 볼품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욥의 복이다.

11. 신세한탄 내지는 하소연을 하던 욥이 갑자기 자신의 말이 돌에 단단히 새겨지기를 바란다. 무슨 목적으로 자신의 말이 보존되어야 할까?

    자신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할 날이 올 것이기에: 기록을 남겨 두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들의 말이 다 다르고,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12. 연이란(24) 납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영히 돌에 새기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단단한 곳에 글씨를 철필로 새기고 거기에 납을 부어서 굳히는 것이 고대의 문서 보관법 중의 하나였다.

13. 구속자란 ‘기업 무를 자’를 뜻한다. 어려운 사정으로 팔려간 가족이나 토지를 대신 사주어야 할 가까운 친족을 가리키는 말이다(고엘 제도, 룻 4:1-12, 레 25:23-55). 욥에게 있는 구속자(25)는 누구일까?

    하나님(26): 하나님만이 자신의 고난, 억울함을 다 풀어주실 분이라고 확신하는 말이다. 자신에게 닥친 이 모든 고통과 재난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도 알았고, 그것을 해결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런 신뢰가 결국은 이런 아름다운 고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욥이 의도했건 않았건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암시로 욥기의 절정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구절을 근거로 ‘내 주는 살아 계시고(메시야 45번, 찬송가 170장)’라는 찬송이 불려진다. 이런 놀라운 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욥을 통해서 계시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가장 큰 고통도 결국은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진주조개가 상처를 통해서 진주를 만들듯!

14.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도와줄 자를 찾고 있었다. 9:33, 16:19-2, 19:25에서 자신을 도와줄 자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비교해보자.

    9:33절에서 중재자, 16:19-21에서 증인(변호인), 19:25에서는 구속자가 나타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역할을 맡은 분이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자신에게 닥친 이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도, 투정도 부려 보지만 결국은 그 분이 모든 것의 해결책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다.

15. 문드러져 가는 육체를 보면서 욥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 신약적인 표현으로 설명해 보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란 신약적으로 말하면 불완전한 몸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몸을 덧입는 것을 말한다(고후 5:1-7). 이것은 하나님과 제대로 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16. 하나님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지만 시선을 돌려 친구들을 보면 속이 터진다. 친구들이 하는 말이 무엇이며 그 결말은 어떠하리라고 하는가?

    친구들이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 고통의 모든 원인이 욥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친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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