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7장


1. 16장 후반부(19-21)에서 욥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그러면 이어지는 본 장에서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텐데 3절만 제외하면 다시 절망으로 퇴보한다.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는 셈인데 왜 그럴까?

    그만큼 고통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논리정연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되는 대로 퍼붓는 것이 정상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논리보다는 무조건적인 동정이 더 바람직하다. 우선 급한 것이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2. 친구들의 위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도 희망이 없다. 그러면 남은 마지막 일은 무엇인가?

    죽어야지(1): 욥은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3. 이 부분(1-5)이 16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외에 보증물을 주실 이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보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동일한 문맥이다.

4. ‘손을 칠 자’란 무슨 뜻인가(3)?

    보증인이 되는 것: 문맥상으로 그렇다.

5. 하나님께서 보증인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3)을 보면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욥의 무죄함에 대한 보증: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희가 보증인이 되어 ‘다른 사람은 다 그럴지라도 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어야 할 친구놈들이 거꾸로 자신을 죄인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와줄 것을 기대했던 친구들에게 오히려 비난과 정죄를 당하면 얼마나 아플까?

6. 아무리 친구들이 아픔을 주었다고하더라도 자식의 눈이 멀기를 바라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당시의 속담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진정으로 그렇게 되기를 비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이런 속담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7.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을 6-9절에서 하나 고른다면?

    6절의 ‘하나님이’: 어쨌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놓치 않으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8. 사람들은 남의 곤경에 대해서 공감하며 아파하기보다는 조롱하기를 대단히 좋아한다. 특히 욥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멋진 안주거리다. 그런 말을 듣는 욥의 형편은 어떠한가(7)?

    눈 앞이 캄캄하고 전신이 무기력함: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나면 육체마저도 힘을 잃어버린다. 그림자는 허무함이나 연약함을 의미한다.

9. 8-9절은 다소 애매한 점이 있는 모양이지만 대체로 ‘정직자, 무죄자, 사곡한 자, 의인, 손이 깨끗한 자’는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자. (9절의 ‘그러므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정직자, 무죄자는 친구들을, 사곡한 자, 의인, 손이 깨끗한 자는 욥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친구들이 욥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분을 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결국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10. 어쩌면 말할 힘도 없는 형편이 아니었을까? 육신의 고통이 심해지면 신념도 흔들리게 마련인데 친구들의 철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욥이 악착같이 하는 말은 무엇인가?

    너희는 지혜자가 아니다(10): 내가 죽을 형편에 처했다고 해도 너희의 말이 옳지 않다. 욥은 이런 확신을 가질만큼 자신의 결백을 굳게 믿었다. 그럴만큼 온전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을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불러도 이의가 없다.

11. 친구들의 생각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또 낙심하고 절망한다(11). 위로하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헛소리를 하는가(12)?

    빛이 가깝다, 즉 곧 낮이 온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다. 이런 말이 욥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12. 13절의 ‘내 소망이’라는 말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영역본에는 13-14절에 If가 세 번 나온다는 점을 참고해서(원문에는 13절 초두에 하나뿐) 쉽게 번역을 시도해보자.

    만약 저승을 집으로 삼고 (만약) 어둠을 침대로 삼아 (만약) 무덤을 아버지, 시신을 파먹는 구더기를 어머니, 누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라면 내게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3절과 6절 참고). 이해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

13. 욥은 여러번 죽음을 노래했는데(3:11-19, 6:8-13, 7:15-16, 10:18-22, 14:13-15) 여기서도(17:11-16) 또 죽음을 소망하고 있다. 자살하겠다는 의미일까?

    죽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죽을 마음이 없다: ‘죽겠다’고 소문을 내면서 가방에 쥐약을 넣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친구들이 말리고 담임선생님이 좋은 말로 달래고 달래도 툭하면 쥐약을 사서 가방에 넣곤 했다. 그 보고를 들은 교장선생님이 아이를 불러서 쥐약을 직접 먹여주겠다고 나서니까 아이가 항복하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그 교장 선생님 말씀이 진짜 죽을 아이는 그렇게 표시를 내지 않는단다.

    욥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소망은 단지 모든 아픔의 끝을 의미할 뿐이다. 고통의 탈출구라는 의미로 죽음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나 욥도 더 이상은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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