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장


15-21장은 2차 변론이다. 15장에서는, 욥의 불경건함에 대한 정죄(1-6), 욥의 불손함과 교만함에 대한 비난(7-16), 악인의고통(17-35)으로 문단을 나눌 수 있다.

1.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의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가장 대표적인 표현 하나만 고른다면?

    동풍(=헛된 지식, 유조(有助)치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 팔레스틴에 부는 동풍은 일종의 열풍으로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준다. 욥의 말이 그렇게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는 말이다. 욥이 친구들보다 자신이 더 지혜롭다고 한 말(12:3, 13:2)에 대한 반론이다.

2.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의 말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아서 어떤 위험이 있는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4b): 신앙인의 비신앙적인 말은 불신자의 말보다 더 부정적인 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다. 엘리바스가 욥을 오해하고 있으니 욥의 말이 이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3. 엘리바스는 무슨 증거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확신하는가?

    증거는 없지만 욥의 말로 봐서(5-6): ‘증거는 없지만 뚜렷한 동기와 정황이 그렇다’는 것은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네가 하는 말을 보니 죄를 지은 탓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짓이다.

4. 엘리바스의 비난에 따르면(7-8) 욥은 마치 무엇과 같은 존재인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 산이 창조되기 전에 출생한, 하나님의 모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비슷하거나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천사를 가리킨다고 보아야겠다. 욥의 대답에 대한 느낌을 조금 심하게 과장했을 것이다.

5. 논쟁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패배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초점을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없다는 쪽으로 옮기는 일이다. 엘리바스가 나이를 언급한 것(10)은 무엇을 강조하려고 그러는가?

    지혜: 연륜이 쌓여야 지혜가 생기는 것도 대체로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젊은 사람보다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다고, 선배라고 자기보다 탁월한 젊은이나 후배를 함부로 대하는 일이 적지 않다. 나은 것은 나이 밖에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냉정하게 후배의 능력을 살필 지혜가 없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더 지혜롭다.

6. 잘 대해주면 기어오른단다(선생님, 군대 조교, 선배의 말). 그래서 처음에는 일부러 엄격하게 대하기도 한다. 그와 비슷한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작다 하는 것(11): 공갈을 치면 겁을 내고 위로의 말을 하면 만만하게 보는가? 오래 전 일이지만 아이들이 내게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실 때 늘 웃고 들어오셨어요’ 했다. 그런 모습이 가장 좋았다는 말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웃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웃지 않는단다. 엄숙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교실에 들어가야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 학교, 교회가 되려면 ‘온유한 말’이 권위가 있어야 한다. ‘목사가 교인들과 너무 친하면 안된다?’ ‘교회 일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7. 우리는 누군가에게 반항을 하게 되면 못된 생각을 품게되고, 그 생각이 눈이나 입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엘리바스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12-13)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악한 마음에 이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눈을 휘번득이며)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15:13): 회개하라는 데도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악한 짓이라는 것이다.

8. 선배가 똑똑한 후배를 향해서 ‘네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고 따지면 엔간히 똑똑한 후배라도 할 말이 별로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말은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의 기를 꺾는 나쁜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좌절감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 있다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14절): 말은 맞지만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택도 없이 나대는 사람을 주저 앉히는 경우에는 유용하겠지만, 진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독약과 같은 진실이다.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이 인간의 전적 부패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9:20). 단지 자기에게 일어난 비극이 친구들이 말하는 특정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9. 엘리바스는 일차적으로 욥의 지혜를 나이 먹은 자신들과 비교하고 또 하나님과 비교하여 비판한 후에 조상들의 지혜와 비교한다(18). 겸손하게 항복하라는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무엇인가?

    악인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20-31): 조상들의 지혜가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렀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두려운 분이시며, 두려움으로 섬겨야 할 분이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이 말은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엘리바스가 말하는 지혜가 이런 식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런 류의 부정적인 말만 하게 된다. 그것이 지혜롭지 못할 때가 많다. 야단치거나 혼을 내야 할 때에도 차라리 격려하고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다. 엘리바스가 가르치는 말은 덜 지혜로운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다. 19절은 지혜로운 자들이 누린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혜가 외인들에 의해서 굴절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지혜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10. 이전에 욥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한 적이 있다(12:6). 엘리바스의 어느 말이 욥의 이 말에 대한 반박일 수도 있을까?

    악인은 평생을 고통 가운데서 지내게 된다(20): 어떡하나? 그것이 욥에게는 지혜로운 말로 들리지 않는데?

11. 악인에 대한 엘리바스의 말 중에(20-31) 욥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은 무엇일까?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25): 욥이 이런 저런 탄식을 내뱉으며 원망의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모독하지는 않았다. 엘리바스의 편견일 뿐이다.

12. 불의한 자의 말로를 한 마디로 하면?

    익기 전에 떨어지는 열매, 불타는 장막: 이렇게 주장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된다거나 후대에 가서는 그렇게 된다고 우길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13. 엘리바스의 요지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인과응보에 매인 생각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세상인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엘리바스가 정말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게는 단 한 가지의 원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나 목적이, 경우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공의, 사랑, 연단 등,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라도 적용하는 원칙이 다르면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악인에게도 선인과 마찬가지로 해를 비추시며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마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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